백합/오늘의 강론 4569

다윗과 요나탄, 예수와 바오로

다윗과 요나탄, 예수와 바오로 1사무 18,6-19,7; 마르 3,7-12 / 2022.1.20.; 연중 제2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이스라엘의 마지막 판관으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사무엘은 사울에게 임금이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주면서부터 본의 아니게 예언자 역할까지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이 예언자로서 사울에게서 하느님의 축복을 거두고 대신 다윗에게 전하는 순간부터 사울과 다윗의 사이는 악화되었고, 사무엘은 물론 다윗까지도 목숨의 위협을 느낄 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살벌한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은 인물이 사울의 아들 요나탄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수도 있었던 왕자였는데도, 다윗을 끔찍이 아꼈습니다. 어쩌면 사무엘의 예언을 듣고 하느님께서 다윗..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1사무 17,32-51; 마르 3,1-6 / 2022.1.19.; 연중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미사의 독서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복음에서는 안식일 논쟁이 나옵니다. 골리앗은 필리스티아의 장수였고 필리스티아는 당시 강성하던 철기문명의 나라였으나 우상신을 숭배하던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이 철제 검을 들고 나온 골리앗을 대적하려 준비한 무기는 겨우 양치던 목동 시절에 익힌 돌팔매질에서 쓰던 무릿매 끈과 돌멩이 하나였던 것이 이 상황의 우열을 잘 말해줍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집트 탈출 시에 역사적으로 계시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고, 그 하느님과 동족이 맺은 시나이 계약 정신에 투철한 젊은이였습니다. 위기 때마다 하느님께서 개입하시어 도와주심을 철썩같이 믿었던 다윗이 겁..

다윗 이야기

다윗 이야기 1사무 16,1-13; 마르 2,23-28 / 2022.1.18.; 연중 제2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모두 다윗이 등장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지만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억에서는 사실상 이스라엘 왕국을 대표하는 임금이요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임금이었으며 하느님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던 임금이었습니다. 벤야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왕위를 자기 아들에게 계승시키지 못하고 유다 지파 출신의 다윗이 왕위에 오름으로써 일찍이 야곱이 열두 아들을 앞에 두고 장차의 운명을 예언했던 바가 실현되었습니다(창세 49,8). 성경에서 다윗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이룩한 명성에 그치지 않고, 메시아 대망 사상이 신앙급으로 널리 퍼진 가운데 그 메시아..

복음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두 명의 사울

복음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두 명의 사울 1사무 15,16-23; 마르 2,18-22 / 2022.1.17.; 성 안토니오; 이기우 신부 사무엘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지막 판관이었고 사울은 첫 임금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진 판관 시대 250년의 역사는 비록 불안정하기는 했으나 열두 지파가 평등하게 연합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신앙의 백성을 구현했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위협 속에서 지도자들의 신앙이 약화되는 바람에 왕정제도를 도입하여 정치를 안정화시키고자 하는 유혹에 빠졌습니다. 마지막 판관이었던 사무엘은 이 지도자들에게 예언자적인 경고를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들은 막무가내로 요구했고 백성들도 이에 부화뇌동한 결과 사울이 첫 임금으로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사..

[연중 제2주일]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연중 제2주일]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사 62,1-5; 1코린 12,4-11; 요한 2,1-11 2022.1.16.; 연중 제2주일; 이기우 신부 1. 새 창조의 원동력, 사랑과 믿음 지난 주님 세례 축일의 말씀에서 우리가 선포받은 메시지는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다는 어마어마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새 창조의 주역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요한으로부터 물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공생활을 시작하셨는데, 이 순간에 새로운 창조에 필요한 징표를 세 가지나 받으셨습니다. 하늘이 열렸고, 성령께서 내려오셨으며,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이라고 확증해 주시는 음성을 들으신 것입니다. 인류가 창조된 이래 그 당시까지 그 누구에게도 주어지..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 1사무 9,1-10,1; 마르 2,13-17 / 2022.1.15.; 연중 제1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마르코가 전해주는 바에 따르면, 때가 차서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기신 활동은 첫째가 제자들을 부르신 일이고, 둘째가 마귀를 쫓아내신 일이며, 셋째가 아픈 이들을 치유해 주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치 부록처럼 세리였던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일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선 세 가지의 표준적이고 대표적인 복음선포 활동에 대해서는 방관하던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런 돌발 행동은 직전에 중풍 병자를 고쳐주시던 예수님께서 그에게 용서를 베푸신 행동과 관련이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앞선..

치유와 용서

치유와 용서 1사무 8,4-22; 마르 2,1-12 / 2022.1.14.;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예수님께서 마귀도 쫓아내셨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중풍 병자도 있었습니다. 격리되어 살던 나병 환자는 용기를 내기라도 하면 되었지만, 사지가 마비된 중풍 병자는 아무리 용기를 내더라도 혼자서는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중풍은 거동이 불편한 것은 물론이고 심하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사물을 보는 데에도 지장이 생길 수 있고 음식물을 삼키기 어려워지기도 하는 병입니다. 이는 사지근육과 언어 중추, 시각 중추 등을 관장하는 뇌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혀서 뇌세포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해 생기는..

나병 환자의 치유

나병 환자의 치유 1사무 4,1-11; 마르 1,40-45 / 2022.1.13.;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나병을 악성 피부병으로 불렀습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죽음의 맏자식이 사지를 갉아먹는”(욥 18,13)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부정한 자’로 여겨져 공동체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하고 낫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마을로 복귀할 수 없는 저주를 받았습니다(레위 13,45-46). 당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사회적 약자였던 셈입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대개는 가족들이 음식을 조달해 주었겠지만 어쩌다 그것도 어려워져서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들어와야 할 때면, “나는 부정한 사람이오! 멀리 떨어지시오!” 하고 외치며 다녀야 했습니다. 그 수치심이야 이루 말할..

질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

질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 1사무 3,1-20; 마르 1,29-39 / 2022.1.12.; 연중 제1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어주셨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번에는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 먼 데서부터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이스라엘 역사에서 마귀를 쫓아낸 일도 없었거니와 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준 일은 극히 예외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2열왕 5,14; 20,7), 이스라엘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이 구마와 치유 기적은 - 이 기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아주 여러 번 반복되었으므로 - 그분의 신적 능력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자면, 구마는 하느님 나라에 침입한 악령을 쫓아내는 방어적인 일이고 치유는 사탄..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예수 1사무 1,9-20; 마르 1,21-28 / 2022.1.11.;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려 시작하신 공생활에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마르코가 연이어서 보도한 이 부르심과 구마와 치유 행위(마르 1,16-34)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되는 과정의 표준이며,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에게도 치유와 구마가 뗄 수 없는 한 묶음으로 수행해야 할 활동임을 보여줍니다. 더러운 영은 한처음에서부터 하느님을 대적하려던 창조의 적수였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스라엘 사회의 주류로 행세하던 주요 세력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까지도 죄악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