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4569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7.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가시며,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신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유다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 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11호에 타고 있던 닐 암스트롱이 처음으로 달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그러면서 달에 관한 구체적인 연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그전까지는 달은 그저 신비로운 장소일 뿐이었지요. 달에 토끼가 살고 있다는 옥토끼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또 우리나라에서 달이 가장 큰 보름에 맞춰 농경 사회에 의미 있는 행사(정월대보름, 백중, 추석)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달에 직접 갈 수는 없고, 눈에 보이기만 하니 그냥 신비로운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달 착륙 후 신비로움에서 벗어나 구체적으로 우리 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나의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 전하라 욥 3,1-23; 루카 9,51-56 /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2022.9.27. 17세기 프랑스에서 활약한 빈첸시오 사제는 가난한 소농 출신이면서도 이름에서는 귀족의 이름처럼 ‘빈첸시오 아 바오로’로, 그러니까 바오로 가문의 후손 빈첸시오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히브리족의 명문 가문 출신이었던 바오로가 자신을 비주류로 냉대하던 기성 사도단을 피해 이방인의 사도로 자처하면서, 이방인들 중에서도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방인들을 주로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한 것과 비슷합니다. 빈첸시오도 프랑스 안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사도직을 행할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를 양성하여 가톨릭교회 안에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활동이 이어지게 했습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6.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6.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9,46-50: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예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를 두고 다투는 제자들을 보시고, 어린이 하나를 당신 옆에 세우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예수님 옆에 있다는 것은 가장 높은 영광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런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자는 당신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고, 당신을 대접하는 자는 하느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어린이는 순수함과 겸손의 본보기이다. 어린이는 속이지 않는다. 어린이는 생각이 단순해서 높은 지위를 탐하지도 않고 높아지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018년 저의 첫 번째 손주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의 아빠인 조카는 태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이런 말을 자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5. 연중 제26주일 - 부자와 라자로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5. 연중 제26주일 - 부자와 라자로 조욱현 신부님 연중 제26주일: 다해 지난주일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고 하셨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은 그 ..

[연중 제26주일] 부자와 라자로가 함께 앉는 식탁

[연중 제26주일] 부자와 라자로가 함께 앉는 식탁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침에 뉴스를 보면 나쁜 소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침울해지고 화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 뉴스가 주 뉴스로 발표되고, 반면에 좋은 소식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쁜 뉴스를 다 마치고서야 잠깐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소식에 눈길을 더 두는 우리이기에,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너무 많기에 맨 뒷자리 그리고 흔한 일이기에 아주 적은 숫자의 좋은 뉴스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관심을 두..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4.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4.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 9,44-45: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변모가 있은 다음, 그리고 간질병에 걸린 사람을 치유해 주셔서 감탄하고 있을 때, 제자들이 당신에 대해 정확하게 알게 하시려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44절) 그러나 제자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고 감히 물어볼 생각도 못 하였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르면서도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직은 그들이 스승의 십자가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 영광..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 2022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플라세보 효과라고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아무 효과가 없는데도 사람의 신념에 의해 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남자가 말기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의 몸에는 야구공만 한 종양이 자라고 있었지요. 마침 신약이 나왔고, 주치의는 획기적인 신약이 나왔다며 이 약의 효능을 설명하고 환자에게 주사했습니다. 주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환자의 상태가 좋아졌습니다. 종양도 절반도 줄었고, 10일 후에는 퇴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퇴원한 지 두 달 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신약의 효과로 점점 좋아졌던 환자가 왜 이렇게 안 좋아졌는지를 보니, 자신에게 사용된 신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신문 기사를 ..

허무한 두려움, 충만한 놀라움

허무한 두려움, 충만한 놀라움 코헬 11,9-12,8; 루카 9,43-45 /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2022.9.24.;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도 코헬렛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코헬렛’이라는 성서가 쓰인 기원전 3세기 당시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동방 지역을 무력으로 정벌하면서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식으로 동화시켜버린 때였습니다. 이 문화를 헬레니즘이라 불렀는데 이는 그리스 문화를 원천으로 하면서도 ‘길가메시 서사시’ 같이 힘을 숭배하는 고대 중동 공동의 정신문화 유산의 영향도 수용하고 ‘아멘엠오페의 지혜’라고 불리우는 이집트의 무신론적인 정신문화도 받아들였기 때문에, 아주 개방적이면서도 우상숭배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겨온 유다이즘이 희석되어 버릴 위험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