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일] 부자와 라자로가 함께 앉는 식탁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침에 뉴스를 보면 나쁜 소식을 많이 보게 됩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은 전혀 없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보다 보면 침울해지고 화도 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상하게 하는 뉴스가 주 뉴스로 발표되고, 반면에 좋은 소식은 몇 개 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나쁜 뉴스를 다 마치고서야 잠깐 나올 뿐입니다.
세상에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이 많아서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소식에 눈길을 더 두는 우리이기에, 흔하지 않은 나쁜 일이 앞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적은 것이 아니라, 좋은 일이 너무 많기에 맨 뒷자리 그리고 흔한 일이기에 아주 적은 숫자의
좋은 뉴스를 발표하는 것이 아닐까요?
조금만 관심을 두면 우리를 환하게 미소 짓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기의 웃음에서, 사람들의 착한 사랑의 실천에서,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배려의 모습에서 우리는 기분 좋은 미소를 짓습니다.
여기에 비오다가 갑자기 맑아진 하늘에도 큰 기쁨을 얻습니다.
새벽에 벌떡 일어나 개운한 마음으로 새 아침을 맞는 것도 큰 기쁨입니다.
좋은 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온 세상에 나쁜 뉴스로 가득하다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보시니 참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좋은 말과 행동으로 더 좋은 세상이 되는데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만을 생각하는 욕심과 이기심 속에서 좋은 세상을 함께 만들지 못합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말씀을 보게 됩니다.
부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며 호화롭게 살았습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요.
이 둘이 모두 죽어 하늘 나라에 가서는 입장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라자로는 아브라함 옆에서 위로받고, 부자는 불길 속에서 고초를 받습니다.
왜 이렇게 입장이 바뀌었을까요?
부자가 악인이고, 라자로는 선인이기 때문일까요?
부자가 자기 형제를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나쁜 사람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라자로가 했던 선한 행동은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부자가 보였던 자기만 잘 사는 삶이 문제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이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것에만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만큼 주님 말씀에 맞춰서 좋은 세상 만들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큰 영광을 받게 됩니다.
아파하는 마음이 가장 숭고한 사랑이다(박경리).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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