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5. 연중 제26주일 - 부자와 라자로

수성구 2022. 9. 25. 05:00

조욱현 토마스 신부 / 2022. 9. 25. 연중 제26주일 - 부자와 라자로

조욱현 신부님

 

 

연중 제26주일다해

지난주일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 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 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고 하셨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때,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초래하고,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을 소외시키고,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부닥치게 될 것이다.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오늘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에게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모습을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씻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처지가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리고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한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El'azà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잃어버려 더는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