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4569

성 폴리카르포주교 순교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폴리카르포주교 순교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폴리카르포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때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관대함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 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1베드 5,1-4; 마태 16,13-19 / 2022.2.22.;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로 부르신 열두 명 가운데에서 베드로를 택하시어 수제자로 삼으시고, 그에게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 계기와 이유는 베드로가 고백한 믿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열두 명으로 채워지고 나서 예수님께서 이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기도 했고, 병든 이들이나 장애자들을 치유해 주시기도 했으며, 마귀 들린 이들을 만나시면 마귀들을 내쫓아서 자유롭게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도와주신 이들이 거의 대부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었으므로, 베드로는 예언자 이사야가 일찍..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의 묵상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부여된 권한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아람 말 ‘케파’를 그리스 말로 옮긴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바위’(반석)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름을 따로 부여하시면서 그를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 공동체의 토대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위에 세워진 이 교회는 죽음의 세력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는 단단한 기반을 지닌 건물로 묘사됩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며, 그 열쇠로 매고 풀 수 있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저는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야고 3,13-18; 마르 9,14-29 / 2022.2.21.;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이기우 신부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선포하심으로써 새 땅을 펼치시려던 예수님께 그 앞을 가로막은 것은 마귀와 그 하수인들이었고, 그들이 퍼뜨리는 사회악이 하나의 현상으로 사람들 속에 퍼져있었습니다. 그 마귀현상은 종종 영적 면역력이 취약한 사람들에게 침투하여 괴롭히기도 했습니다. 악인들이 마귀의 하수인으로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하느님의 선을 대적하고자 했다면, 탐욕이나 이기심으로 영적 면역력이 취약해 진 죄인들은 마귀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당시에도 제법 많이 퍼져 있던 악인들과 죄인..

믿음의 여정 -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 - 2022.2.21.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믿음의 여정 -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 - 2022.2.21.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2.2.21.연중 제7주간 월요일 야고3,13-18 마르9,14-29 믿음의 여정 -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다 - 요즘 연일 계속되는 주제는 여정입니다. 어제는 하닮의 여정이었고 오늘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이라면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끊임없이 성장 성숙하는 믿음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의 관계 깊어가는 믿음의 여정인지요. 삶은 은총의 선물이자 과제입니다. 믿음의 경우 역시 똑같습니다. 믿음 역시 은총의 선물이자 우리에게 부과된 과제라는 것입니다. 은총과 더불어 우리의 온갖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뒤따라야 믿음의 성장이요 성숙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의 묵상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치유 사건은 보통 치유를 청하는 이들의 굳건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믿음의 본보기로 제시되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악령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라며 다소 애매하게 도움을 청합니다. 앞서 제자들이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이 처음보다 줄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따끔하게 질책하시고 믿음을 독려하십니다. 그렇게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은 그는 역설적이면서도 간절함이 묻어나는 고백을 합니다. “저..

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7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9,14-29: 왜 저희는 악령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어떤 아버지가 마귀 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했던 것 같다. 이때,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마귀를 쫓아내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하고 물었다(28절).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29절). 마귀 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이제 제자들이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자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22절) 라고 청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

[연중 제7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연중 제7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사무 26,2-23; 1코린 15,45-49; 루카 6,27-38 2022.2.20.; 연중 제7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본론이 전개됩니다. 미움 받을 짓을 한다든지, 저주하거나 학대하는 등 사랑을 모르는 자들까지도 이 나라에 초대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사랑의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사울 임금의 부하인 다윗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살려준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생각하기에 사울 임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제2독서는 코린토 공동체의 ..

연중 제7주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7주일 / 정천 사도 요한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을 듣고 있으면, 이 계명들을 지키며 사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인지 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주하는 자를 축복해 주고, 학대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뺨을 때리면 다른 뺨을 내밀고, 겉옷을 가져가면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원수’(怨讐)란 자기나 자기 집안에 어떤 중대한 해를 끼쳐 깊은 원한이 생긴 사람을 뜻할 텐데, 이런 자를 우리가 어떻게 용서까지는 해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말 사랑까지 할 수 있을까요? 이런 비상식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근거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지니신 자비와 사랑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