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7주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1사무 26,2-23; 1코린 15,45-49; 루카 6,27-38
2022.2.20.; 연중 제7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본론이 전개됩니다. 미움 받을 짓을 한다든지, 저주하거나 학대하는 등 사랑을 모르는 자들까지도 이 나라에 초대하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사랑의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사울 임금의 부하인 다윗이 자신을 미워하는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살려준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생각하기에 사울 임금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물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리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늘의 제2독서는 코린토 공동체의 교우들에게 사오 바오로가 부활 신앙에 대해 설명해 주는 내용입니다. 아직 하느님 신앙이 약하고 매사에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그리스인들에게 창조 신앙과 아울러 부활 신앙을 설명하고 있는 사도 바오로의 노력이 돋보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말씀의 초점은 하느님 신앙이 없거나 취약한 이들에게 어떻게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할 것인가 하는 과제에 모아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무슨 말로 축복할까요? 우리를 학대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이들에게도 사랑을 가르쳐주라는 것이 오늘 말씀의 핵심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숱한 기적과 도움을 행하시고 나서 이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동임을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비유의 소재들은 청중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거나 사물이었습니다. 저는 축구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축구는 지구촌 전체에서 가장 인기있는 운동 종목입니다. 열 명이 공격과 수비를 나누어 맡고 골문을 지키는 선수가 있어서 한 팀에 모두 11명이 경기를 합니다. 축구공을 상대편 골문에 넣으면 득점을 하고 많이 득점한 팀이 이기는 규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축구는 발로 공을 차서 옮기는 경기이기 때문에 온 몸을 써서 움직여야 하고 또 혼자서가 아니라 팀 전체가 조직적으로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머리도 써야 합니다. 관중이 보기에 재미있는 경기는 박진감이 넘치고 공격적인 경기입니다. 그 반대로 수비 위주로만 경기를 하면 아주 재미없는 경기가 됩니다. 하지만 늘 수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다음에 조직적인 전술로 공격을 다양하게 해야 하지요.
3. 이와 마찬가지로 사랑을 함에 있어서도 수비적 사랑이 기본인데 이는 악에 물들지 않고 사랑을 모르는 자들을 닮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공격적 사랑은 혼자서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그것도 지능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을 모르는 악인들의 감독은 마귀이기 때문이고, 마귀는 사람보다도 더 교활하고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팀 감독도 성령으로 삼고 그 이끄심에 따라야 합니다. 모든 악은, 미움이나 저주나 학대도 자기 파멸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은 누구나, 그가 비록 악인이라 하더라도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기본 속성을 잘 알고 사랑의 축구경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을 멀리하면서도 악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작전이 기본이 됩니다.
4. 본시 이스라엘 민족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아브라함은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바빌론 문명권의 칼데아 우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떠나왔습니다. 그 후, 그 자손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이집트 땅으로 더부살이를 하러 가게 되고 그곳에서 인구도 늘어났지만 이를 두려워한 이집트 파라오로부터 종살이를 혹독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시켜 가나안 땅으로 이들을 해방시키셨지만, 가나안 땅에 자리잡고 있었던 여러 이민족들의 우상 숭배 풍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많이 물들곤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첫 임금으로 지명받은 사울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그분의 백성으로 이끌려는 생각보다는 주변 민족들과의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더 강했기에 끝내 하느님의 눈에 벗어나 궁지에 몰렸습니다. 전쟁에서는 패배했고 민심은 떠났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상권 26장의 상황의 배경이 그러합니다.
5. 다윗은 이런 사울의 부하로 전공을 많이 세워 높은 계급의 장군으로 승진할 수 있었지만 사울처럼 우상 숭배에 물들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다윗의 인기를 시기한 사울이 그를 죽이려 들었지만, 그는 그 미움을 닮지 않고 사랑으로 되갚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공로가 그를 다음 임금이 되도록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미워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놀라운 개인기를 선보인 셈입니다.
6. 그 다음 제2독서에 나오는 코린토의 상황에 대해 살펴 보겠습니다. 그 당시에 지중해 세계는 정치군사적으로는 로마제국의 힘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지만, 경제문화적으로는 그 반대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비롯한 유럽에는 인구도 적었고 농사도 빈약했기 때문에 생산물이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페르시아를 비롯한 동방에는 인구도 많았고 농사 지을 땅도 넓어서 물산이 풍부했습니다. 그 풍부한 물산을 수탈해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구에 모았다가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동력선이 없어서 사람의 힘만으로 돛단배를 움직여 바다를 항해했으므로, 로마로 가기 전에 두 군데에서는 반드시 쉬어야 했는데, 그 중의 한 항구가 코린토였습니다.
7. 그래서 그리스의 수도였던 아네테보다 코린토가 경제적으로는 더 번창할 수 있었는데, 그만큼 죄악도 크고 많았습니다. 이런 코린토에서 사도 바오로는 잘 나가는 엘리트들보다 보잘것없는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서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일단 코린토의 죄악으로부터는 벗어나게 했지만, 그리스식 사유방식에는 부활 개념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요점이라도 알려주어야 했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해서도 이왕이면 논리적으로 부활 신앙을 설명해 주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에서 수행한 공격적인 선교방식이었고, 오늘 제2독서의 내용이 그 메시지입니다.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입니다. 비유하자면, 그는 하느님 신앙에는 매우 불리한 여건 속에서 살면서 아주 이질적인 사유방식에 젖어서 따지기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어렵지만 대단히 훌륭한 사랑의 전략을 구사한 셈입니다.
8.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느님 신앙의 역사가 오래되었는데도 잘못 믿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하느님과 사랑을 가르치시던 예수님을 두고도 시기하고 저주하는 자들까지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가장 사악한 음모를 꾸몄던 악인들은 사두가이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도 그들이 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임무를 악용하여 종교세와 성전세로 착복하는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어엎은 정화 사건을 일으키셨습니다. 결국 그들의 주도로 사형에 처해지시기는 했는데, 하느님을 모르고 짓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시면서 숨을 거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 방식은 그들처럼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군중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것이었고,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직접 드릴 수 있도록 가르치셨습니다.
9. 그 다음 악인들이 바리사이들입니다. 이들은 평신도 지식인들이었고 중산층 부자들이었는데, 자신들의 명성을 예수님께서 가로채 간다고 여겨서 미워했습니다. 이들은 사두가이들과 힘을 합쳐서 로마 총독의 손을 빌려서 그분을 십자가형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공생활 내내 부딛쳤던 자들도 이들인데, 그때마다 설득하고자 하셨고 맞서셨지만 대놓고 불이익을 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사랑하신 방식은 그들의 율법 대신에 하느님 사랑의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10. 또한 빌라도 총독은 예수님이 죄가 없는 줄을 알면서도 풀어주지 않고 비겁하게 십자가형이라는 판결을 내린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의 배후를 조종한 자들의 죄가 더 크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침묵을 하셨을 뿐 그에 대항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이를 믿는 이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퍼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 진리가 온 세상에 퍼지게 일하셨습니다. 이상이 예수님께서, 사랑을 모르는 자들에게 사랑을 베푸신 방식입니다.
11.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사랑을 모르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의를 일삼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하느님을 믿지 않거나 아예 대놓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에도 이런 사정은 더 심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모든 차원에서 사랑의 전략과 전술을 잘 세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잘 발휘할 수 있는 개인기도 잘 익혀야 하지요. 무엇보다 함께 힘을 합칠 동료와 도와줄 사람들을 잘 찾아야 합니다. 신앙의 토착화와, 민족의 복음화,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의 복음화는 그렇게 이룩되어야 할 선교 과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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