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7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2. 20. 03:43

연중 제7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7주일: 다해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이 사랑의 예가 다윗에게서 나타난다. 다윗은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 26,2)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1사무 26,23).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이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다윗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6,27-38: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0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때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한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던 사건이었다. 한 신자는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흑인들이 들어오면 그냥 훔쳐 가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생각한 끝에 그때부터 그들에게 “너를 믿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나자 그들은 주인 앞에 와서 돈을 치르면서,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졌을 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흑인들은 한인들의 상가를 불을 지르면서 피해를 줬다. 그러나 그 상점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거기에 오던 흑인들이 모두 지붕 위로 올라가서 “이 가게를 불 지르려면 우리도 함께 타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인격적인 관계는 이 위험을 피하게 해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35절).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35절)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온 힘을 다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의 코린토 서간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