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예수께서 거룩하게 변하시다

수성구 2022. 2. 19. 07:00

예수께서 거룩하게 변하시다

야고 3,1-10; 마르 9,2-13 / 2022.2.19.; 연중 제6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시고 타볼 산에 오르시어 거룩하게 변하시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당신의 얼굴과 옷도 새하얗게 빛나게 변하셨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모세와 엘리야까지 불러내셔서 대화하시는 모습까지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지만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인 부활의 현실을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보여주심으로써 베드로를 비롯한 세 제자에게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참모습이었고, 그분께는 이미 부활의 현실이 드리워져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지요.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면, 말에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마음에 담겨 있던 것이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담겨 있지 않는 빈 말은 그저 허공을 울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 말을 아무리 많이 해보아야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창조된 피조물 세상의 질서를 침묵으로 움직이시는 이치와 대조적입니다. 

 

  일찍이 세례자 요한은 군중에게 자신을 소개하기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마르 1,3)라고 겸손하게 낮추었지만 사실 그는 말씀을 가리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 이처럼 예언자의 말은 말씀을 담거나 가리키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미사 중 영성체 의식에서 사제도 축성된 성체를 신자들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사의 강론은 사제의 말로 행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거나 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말은 들은 즉시 사라지고 잊혀져 버립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가리키거나 담고 있으면, 말씀의 힘이 들은 이들로 하여금 영적인 기운을 주어 삶을 변화시키고 현실을 변화시켜 하느님의 질서를 완성시키고야 맙니다. 

 

  말씀을 담지 못하고 마음조차 담지 못한 말소리가 저지르는 죄악과 어지러움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가 경고합니다.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누가 말을 하면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면, 그는 자기의 온 몸을 다스릴 수 있는 완전한 사람입니다”(야고 3,2). 이럴 정도로 말씀은 물론 마음도 담지 않은 말은 위험하고, 반면에 하느님의 말씀이나 적어도 마음을 담은 말을 하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 앞에 보여주신 거룩한 변모 상황은 그 자체가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나누신 이야기도 하느님의 말씀에 속합니다. 미사 중 말씀 전례의 상황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도무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던 베드로가 겁에 질려 엉겁결에 입 밖으로 내놓은 말은 빈 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소리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들려왔던 바로 그 말씀입니다. 바야흐로 새 하늘이 열렸으므로 그분이 새 땅을 창조하고 계심을 상기시켜주는 그런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한 변모는 미리 보여주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이었고, 이를 통해 그 당장에는 알아듣지 못했던 세 제자도 성령을 받은 나중에는 담대한 믿음을 지닌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체포하여 매를 때리고 겁박하는 대사제 앞에서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사도 4,19).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말도 말씀을 반영하여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무언가 속된 것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서 새 창조에 이바지하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우리의 말을 서로에게 전해주는 이른바 언론 기능 역시 창조적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사실과 진실에 입각해야 하고 거짓을 전하거나 없는 것을 꾸며서 가짜 말을 전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미사의 강론에도 언론 기능이 있는데, 그것은 그날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가려내어 현실에 맞도록 재구성해서 전달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거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해서는 쓸데없는 분란과 갈등만 일으킬 따름입니다. 그러니 말로 이루어지는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이상, 말씀과 말과 소리에 관한 묵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