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실천으로 얻는 목숨
야고 2,14-26; 마르 8,34-9,1 / 2022.2.18.; 연중 제6주간 금요일; 이기우 신부
믿음과 실천으로 얻는 새 목숨이 부활 신앙의 은총입니다. 오늘 말씀의 맥락입니다.
모처럼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시는 스승의 질문에 제자들이 우물쭈물 하는 동안에 베드로는 용기를 내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 용감한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엄중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5)고 십자가의 의미와 중요성에 관해 강조하심으로써 구도의 죽비를 내리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오늘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가 강조하는 바, 믿음과 실천이 한데 만나야 가능한 부활의 조건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질 리가 없고, 실천하는 않고 머릿속이나 입으로만 십자가를 짊어지려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믿음이 생겨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짊어지는 십자가는 정직하게 우리네 영혼을 착실하게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백 번의 넘어짐 끝에 또 다시 시도한 일어남으로 인간이 비로소 성취를 해 냅니다. 성취를 위해 필요했던 백 번의 넘어짐은 허사가 아닙니다. 무릇 모든 사람에게 십자가는 이 넘어짐과 일어남의 교훈을 줍니다. 그 넘어짐 속에는 갈등도 있고, 번뇌도 숨어 있으며, 시행착오와 실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모든 실패의 넘어짐이 우리를 착실하게 성장시키고 성숙시킵니다. 믿음의 키를 성장시키고 영성의 깊이를 숙성시킵니다. 이를 합해서 내공(內功)이라 합니다.
이 내공은 정신의 의식이 성장하고 영혼의 영성이 성숙하는 데에서만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가 일하며 다른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에서도 얻어지고 또 발휘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가운데, 또는 기도하는 마음가짐으로 생활하는 가운데 성령께서는 일과 인간관계에서 모두,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을 성찰하고 통회하는 작은 연옥 체험을 주십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작은 심판을 받으며 우리가 정화되고 또 성화되는 은총을 받습니다. 실천이 가져다주는 영적 유익이 이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이 위대한 고백을 예수님께 바치고 나서 결정적인 순간에 넘어졌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힘드셨던 순간은 십자가에 못 박혀 심장이 요동치고 허파가 짓눌리는 순간이 아니라, 가장 믿었던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던 그 순간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가장 먼저 신앙을 고백하며 충성을 다짐했던 수제자가 스승을 제일 먼저 배신하였습니다. 어쩌면 용감했던 신앙 고백보다도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비겁한 체험이 더 베드로의 신앙을 키워준 십자가가 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부활 이후에 갈랠래아로 그를 찾아가서 다시 한 번 신앙 고백을 다짐받으심으로써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다시는 제자 노릇을 하지 않을 것처럼 도망치다시피 스스로 쫓겨간 그 호숫가로 쫓아오신 예수님께서는 엄한 심판자로서 그를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코 베드로를 당신의 수제자로 쓰시려는 하느님 신비의 관리자로서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 번의 부인 횟수만큼 세 번의 질문을 던지셨고, 이때마다 그는 매우 괴롭고 부끄러웠겠지만, 사랑의 고백을 드렸습니다. 그로써 아픈 만큼 배신의 상처는 아물었고 나았습니다. 신앙 고백의 부족함을 십자가 발언으로 보충하셨던 것처럼, 이제는 실제 행동으로도 스승은 수제자를 가르치셨다고 하겠습니다. 고해성사의 백미를 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는 예수님께 대하여, 혹시 십자가도 짊어지지 못하는 또 다른 실패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시라는 계시 진리의 복음성은 바로 이 대목에서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그분은 인간의 나약한 본성을 몸소 겪으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상 숭배로 하느님을 떠나지 않는 한, 당신이 먼저 나약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일어나서 당신의 십자가를 따라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주십니다. 아니, 함께 짊어지자고 하실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갈등에 주저앉지 말아야 합니다. 번뇌를 뿌리칠 필요도 없습니다. 시행착오도, 실패도 다 우리의 신앙 농사를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거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얻는 새 목숨으로 부활을 약속하는 희망의 종교이면서도 또한 십자가의 지렛대로 헌 목숨을 버리게 함으로써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현실적인 신앙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에 나가 실천을 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시기에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야고보의 권고를 들려 드립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르 8,36) .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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