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베드로의 신앙
야고 2,1-9; 마르 8,27-33 / 2022.2.17.; 연중 제6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였습니다. 이 대목을 중심으로 삼아서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를 쓴 마르코는 여든 꼭지가 넘는 모든 본문에서 집요하게 예수는 누구인가를 묻고 독자들이 대답하도록 이끌었는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오늘 복음 대목이 그 모범 답안이었습니다.
마르코는 초대교회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이끌던 바르나바의 조카였고, 베드로를 따라다니던 비서였으며, 소아시아로 선교여행에 동행했던 바오로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던 처지였습니다. 베드로로부터는 정통 그리스도 신앙을 배웠고, 바오로로부터는 심오한 십자가의 영성을 배웠습니다.
그리하여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자신이 쓴 복음서의 중심으로 삼아 써 내려간 최초의 복음서를 선보임으로써 최초의 신앙 고백자로서 베드로를 내세우면서도, 이 신앙이 나중에 스승을 배신할 정도로 유약함이 드러났기 때문에 그 배신의 처신에 대해서도 엄정한 자세로 낱낱이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수난에 유약했던 베드로 사도의 이 ‘입술 고백’보다는 십자가 아래에서 수난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39)을 진정성 있게 보았기에 복음서의 결론 겸 실질적 핵심으로 삼았습니다.
또한 마르코가 보기에 바오로는 박해자의 전력을 한평생 꼬리표처럼 달고 다녀야 했던 죄인이었고, 더군다나 다른 제자들과 달리 생전에 예수님께 직접 배우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 영성에 통달한 사도였습니다. 이를테면 영성의 천재였던 셈인데, 이토록 뛰어난 바오로를 따라다니며 신앙을 심화시킨 마르코는 “십자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 없다.”는 기조로 바오로의 십자가 영성을 자신이 쓴 복음서의 기조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바오로처럼 자기 이름으로 여러 공동체에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는 쓰지 않았습니다. 마르코가 보기에 자칫 신앙이 어린 신자들이 바오로의 편지를 읽으면 예수님보다 바오로가 더 두드러져 보일 가능성이 있었고 예수님조차 세상에 강생하신 인성보다는 신성이 부각되어 마치 ‘걸어다니는 하느님’ 정도의 이미지로 각인될 염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복음선포의 주체가 되시는 문학양식으로 신앙의 역사를 증언했고 이것이 후에 ‘복음서’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바르나바와 바오로와 함께 다니던 제1차 선교여행 도중에 이러한 생각을 굳힌 마르코는 다시 팔레스티나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만났던 증인들을 광범위하게 찾아다니며 보충 취재를 하여 복음서를 구성하였습니다. 이러한 마르코의 시도가 성령께서 이끄신 결과라는 것은 뒤이어 마태오, 루카 그리고 요한도 마르코처럼 복음서를 저술한 데에서 입증됩니다. .
오늘 복음에서도 마르코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님의 수난 부활 예고를 잇달아 보도하면서,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은 십자가로 부활하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죄도 없이 죄인으로 몰려서 십자가 형을 받으시는 것은 당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죄인으로 몰아간 악인들의 죄 때문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에덴 동산 이래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물들여 온 세상의 죄 때문이었음을 마르코는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무죄한 처지이시면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이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죽어가신 이유는 그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간직하셨기 때문임을 마르코는 ‘메시아 비밀 사상’이라는 복음서 코드에 숨겨 놓았습니다. 또한 그래서 그분의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서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하고, 이것이 하느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임을 그래서 여러 군데에서 강조해 놓기도 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세상의 죄를 없앰으로써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오늘 독서에서 강조하다시피, 특히 가난한 이들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하느님과 소통하는 신앙이란 세상과도 연대하는 인간관계를 필연적으로 초래합니다. 이 관계에서 가난한 이들이 우선적으로 대우받아야 함은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정확한 사회의식을 전제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바야흐로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계심을 깨닫는 눈이야말로 사회의식이고, 이 새 세상에서 가난한 이들은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하도록 섭리된 존재였습니다.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은 새 세상의 두드러진 특징이었습니다.
그러자면 이 사회의식은 지금의 사회가 과거에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아는 역사의식도 자연스럽게 요청합니다.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세상에서는 가난한 이들도 없었고, 설사 가난한 이들이 생겨난다 해도 소외되지 않고 대접받아 그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으며, 또 하느님께서 완성하실 세상에서는 가난을 벗어난 가난한 이들이 아직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더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자기 삶을 나누고 투신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리라고 예수님께서는 내다보셨습니다. 신앙 고백에 입각한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사람들의 본성과 지성을 계몽시키고 세상을 문명화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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