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는 빨리, 말하기는 더디, 보기는 똑똑히 하기
야고 1,19-27; 마르 8,22-26 / 2022.2.16.;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해야 합니다. 그러면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을 얻게 됩니다. 이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의 세속적 죄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줍니다. 하느님 말씀은 공손히 받아들이되, 받아들인 말씀에 따라 실행하는 데 힘 써야 합니다. 그리하면 실행하는 자기 자신도 행복해지지만 그 실행의 혜택을 받는 이들도 행복해집니다. 이 신심에 따라 하느님 말씀을 실행하면 고아와 과부 등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해집니다.
이상이 사도 야고보의 권고인데, 이는 이미 부활한 삶의 행동양식입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자신이 쓴 복음서의 핵심을 8,29에 있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두고 그 앞뒤로 예수님께서 만난 사람들을 배치했는데, 이 신앙 고백 바로 앞에는 예수님의 손으로 눈을 뜨게 된 벳사이다의 소경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 고백 뒤에는 예리코의 소경이 눈을 뜬 이야기를 배치하였습니다(마르 10,46-52). 그런데 이 두 소경이 아주 대조적으로 소개됩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은 이름도 없이 나오는데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데려와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리코의 소경은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이 소개되는 한편 자기 발로 걸어와서 스스로 치유해 주시기를 청했습니다.
벳사이다의 소경은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 눈을 뜨게 해 주시는데, 그것도 두 단계로 나뉘어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희미하게 보이다가, 두 번째로 손을 댄 다음에야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사람들이 구박을 하며 도와주지 않는데도 두 번에 걸쳐 적극적으로 청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손을 대실 필요도 없이,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르 10,52) 하는 말씀 한 마디로 그는 눈을 떴습니다.
그 결과, 벳사이다의 소경은 그냥 집으로 돌려 보내졌지만 예리코의 소경은 제자로 받아들여져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단순히 눈먼 사람이 눈을 뜬 이야기로 소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즉,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느냐 없느냐, 또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로 다짐하느냐 하지 않느냐, 또 달리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가 혹은 그저 형식적인 신앙을 지니고 살아가고자 하는가에 따라서 예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이치를 일깨워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사도적 권고는 벳사이다 소경의 수준에서라면 그저 좋은 말씀이려니 생각하고는 한 쪽 귀로 듣고 다른 쪽 귀로 흘려보냄직한 내용이지만, 예리코 소경의 수준에서라면 가슴에 새겨서 실천함으로써 자신의 생활이 바로 복음선포가 되게 할 만한 내용입니다.
신앙 고백이나 부활 신앙이 벳사이다 수준과 예리코 수준을 가르는 기준이 되는 이유는 이 두 가지 모두 우리네 삶과 일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마다 하는 신앙 고백을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습관적으로 해치우려 합니다. 의미를 헤아려볼 엄두도 내지 않습니다. 또, 부활이란 부활절 하루만 듣는 말씀이요, 죽어서 언제일지 모를 미래에 이루어질 막연하기 짝이 없는 사건으로 간주합니다. 그것도 죽으면 썩어 없어질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쯤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묵주기도를 바칠 때마다 제일 처음에 하는 기도이므로 그때마다 의미를 꼼꼼하게 헤아려 가슴에 새깁니다. 인류가 알아낸 것 중에 가장 귀한 진리가 그 기도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에서는 그 신앙 고백을 하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슴 벅차게 외치듯이 기도합니다. 그 숱한 순교자들이 신앙 때문에 박해를 당해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되뇌었던 소중한 언어, 그것이 신앙 고백입니다. 또, 부활이란 예리코 수준에서는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생기를 의미합니다. 세속적인 이익이나 편리함보다는 좀 더 이타적이고 고상한 가치를 위하여 살고자 하며, 다스림보다는 섬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삶이 부활입니다.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내 지갑에 있는 돈이 내 재산이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하느님께서 기억하시는 돈이 내 재산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군가를 위해 값지게 쓴 돈이야말로 진정한 내 재산이라고 심판 때에는 물론 항상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실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돈에 대해 주신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벳사이다 수준에서는 돈보다 더 귀한 시간이나, 그 시간을 들여서 얻은 지식이나 명예 등도 다 나를 위한 것이지만, 예리코 수준에서는 시간이든 지식이든 명예든 나를 위해서는 별로 가치가 없고 그것들이 누군가를 위해 바쳐지는 사랑의 도구일 때에 진정한 내 것이 된다고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사랑을 기억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끗한 신심은, 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 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야고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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