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21)
야고 1,12-18; 마르 8,14-21 / 2022.2.15.; 연중 제6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 말씀에서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선문답(禪問答) 같은 대화가 서로 엇갈려 나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모시고 배로 갈릴래아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카파르나움 근처 평원에서 두 차례나 빵의 기적 사건을 겪은 후 몰려드는 군중을 피해서 급히 서둘러서 호수를 건너가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은 빵의 기적 사건에서 굶주린 군중에게 나누어주고는 정작 자신들이 먹을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미처 빵을 챙겨오지 못한 형편을 짐짓 모르시는 척 느닷없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 하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빵이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자 당신의 말씀을 도무지 알아 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역정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굶주릴 뻔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시면서도 사실 더 관심을 두셨던 것은 당신을 따르던 제자들이 그 기적의 뜻을 깨닫는 것이었는데, 제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깨닫기를 바라셨던 스승과 여전히 마음이 열리지 못한 제자들 사이에 평행선 같은 문답이 오고 갔습니다.
제자들은 빵의 기적에서 늘어난 빵과 배불리 먹게 된 군중의 열광적 반응만이 아니라, 먹고도 남은 빵 조각들이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리고 하필 그 광주리와 바구니의 숫자는 왜 열둘과 일곱이었는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마르 8,18) 하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전 것이지요.
제자들이 사도가 된 후에 그들의 제자가 되어 배운 교부들은 이를 이렇게 풀이해 주었습니다. 5천 명도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에서 남은 빵 조각들이 제자들의 수효와 같은 열두 광주리였던 것은 군중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고 오직 제자들만 알 수 있었던 화두(話頭)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종살이에서 해방될 때에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이루어진 열두 지파 체제로 구성되었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무너지고 만 열두 지파 체제를 대신할 새 이스라엘 백성으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뜻을 알아들어야 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열두 제자의 하나였던 이스카리옷 유다가 스승을 밀고한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서 죽고 난 후, 나머지 제자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 우선 제일 먼저 마티아를 뽑아서 열두 사도 체제를 보강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예언자적인 표징으로 행하신 역사적인 선택을 계승하고자 했던 것입니다(사도 1,15-26).
하지만 열두 광주리는 이 보다 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니, 빵의 기적은 열두 사도가 주춧돌이 된 교회에서 성체성사로 세상 끝 날까지 일어나야 한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곱 바구니는 신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내려주신 일곱 은사와 교회가 제정한 일곱 성사를 아울러 의미하는데, 이 은사들과 성사들이야말로 성체와 성혈처럼 영적인 빵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사도들의 제자인 교부들이 예수님 말씀을 풀이해 주었듯이,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공동체 교우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묵은 누룩을 깨끗이 치우고 새 반죽이 되십시오. 여러분은 누룩 없는 빵입니다. 그러므로 악의와 사악함이라는 묵은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7-8). 실제로 헤로데의 누룩은 악의의 묵은 누룩이었고 바리사이들의 누룩은 사악함의 누룩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른 시대에 이집트에서 서둘러 빠져나오던 이스라엘 백성은 빵의 반죽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할 때에 미처 누룩을 발효시켜 반죽을 부풀게 할 여유가 없이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 ‘누룩 없는 빵’은 파스카 축제의 상징으로 남았고, 그래서 오늘날 미사에서도 면병에는 누룩을 넣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룩의 상태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인 상태로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바는 이것입니다. 오늘날 천주교 신자들은 빵의 기적 대신 미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 뵙고 있는데,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축성되는 미사에서 정작 눈으로 보고 귀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성체와 성혈의 물리적이거나 화학적인 변화가 아니라,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고 거룩하게 변화될 신자들의 영적인 깨달음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신앙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신비가 이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체와 성혈을 축성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 하고 외치는 것이고, 이 환호에 화답하여 신자들은 자신들도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부활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유혹과 시련의 십자가는(야고 1,12) 인내와 믿음을 발휘해야 부활의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망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다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야고 1,15). 야고보 사도가 우리의 깨달음을 위해 이렇게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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