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표징, 시대의 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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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 1,1-11; 마르 8,11-13 / 2022.2.14.(월);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람에 논쟁이 벌어지게 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셔야 했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마르 8,12). 논쟁을 걸어온 바리사이들은 이번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줄곧 적대적 태도를 보여준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탄식을 하시게 되었느냐 하면, 그분은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이심을 누차 가르침이나 기적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고약하게도, 이미 보여준 표징들은 무시하고 자신들이 인정할 만한 표징을 보여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런 바리사이들의 사악함 때문에,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며 보여주신 가장 큰 하늘의 표징이 십자가 죽음 사건이었는데, 그네들은 이 사건에서 배우거나 깨닫는 바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그분의 죽음을 사두가이들의 뒤에서 교사하고 선동했었지요(마태 22,15). 선교사가 된 바오로가 사울로 불리었던 시절에 열성적인 바리사이로서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로 간주했던 것처럼, 다른 바리사이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율법 지식으로 얻은 사회적 명성을 기반으로 경제적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빼앗기도 하고(마태 23,14), 빌려준 돈을 갚지 못하는 농부들의 토지를 불법적으로 가로채서 부재지주 노릇도 하는 등(마태 23,28), 의로움 대신 불의를 저지르며 자비 대신 착취를 일삼고 신의 대신 배신을 밥 먹듯이 저지르고 있었습니다(마태 23,23). 이런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비행과 위선을 예수님께서 고발하시니까,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무시하고 모든 선행도 외면하면서 오로지 증오에 가득차서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진실을 보지 못하던 그네들의 눈은 멀어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이들에게는 이런 그분의 말씀이 제격입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 5,29). 이들은 예수님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찾아내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던(마태 7,3) 자들로서, 마음의 눈이 멀어버린 자들이었습니다(요한 9,39-41).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시대에 걸쳐 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탐구하고 이를 복음의 빛으로 해석하여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 세대에 알맞은 방법으로 교회는 현세와 내세의 삶의 의미 그리고 그 상호 관계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있을 것이다”(사목헌장 4항). 이에 따라서 프란치스코 현 교황도 교황직에 오른 직후 2013년 신앙의 해를 폐막하고 나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반포한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시대의 표징을 식별하는 일에 관해서, 백성의 말에 귀기울여 강론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강론자는 백성의 말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신자들이 들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강론자는 말씀의 관상자이고 또한 그의 백성의 관상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이런저런 인간 집단을 특징짓는 갈망, 풍요와 한계, 기도하고 사랑하며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실질적 대상자들’에게 주의를 기울이고 ‘그들의 언어, 그들의 표징과 상징들을 고려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입니다. 강론자는 성경 본문의 메시지를 인간 상황에, 하느님 말씀의 빛을 갈구하는 경험에 연결시킬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관심은 매우 종교적이고 사목적인 관심입니다. 근본적으로 이는 ‘그러한 사건들 안에서 하느님 메시지를 읽는 참된 영적 감수성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령의 빛으로 ’하느님께서 역사적인 상황 바로 그곳에 울려 퍼지게 하고 계신 어떤 부르심‘을 인식하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또한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통하여, 신자들을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이미 그분이 하늘의 표징이시므로 더 이상 하늘의 표징을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시대의 표징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신자들과 함께 식별해 낸 시대의 표징들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요한 14,6)를 따라서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징검다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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