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4569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김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김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때는 저녁입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과 동행하지 않으십니다. 그때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어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습니다. 저녁은 빛이 적은 시간으로 사탄이 활동하는 때를 상징합니다. 게다가 호수 가운데에 배를 띄웠는데 바람까지 불어 배 안으로 물이 들이칠지 모르는 매우 위급한 상황입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 6,16-21: 나다. 두려워할 것 없다 빵의 기적 후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서둘러 배를 태워 카파르나움으로 가게 하시고는 당신은 산으로 피하시어 늦도록 홀로 기도하고 계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배를 타고 떠나간 것처럼 보이게 하여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히시려고 제자들에게 먼저 떠나라고 하신다. 배를 타고 갈 때, 그 상황이 제자들을 더욱 절박하게 한다. 파도치는 물결 위에 연기처럼 떠 있는 너무나도 캄캄한 밤은 그들을 불안하게 했고 배를 어디로 저어가야 할지 몰랐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와 함께 물결을 일으켜 높은 파도가 치는 것도 문제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17절) 그들의 두..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도 5,34-42; 요한 6,1-15 / 2022.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기념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 나타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포석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의 기적에서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었다는 행적에 깔려 있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가 선교의 성과가 풍요로울 것임을 암시하는 마법의 숫자라면, 이 마법을 가능하게 해 줄 필수 조건은 12라는 숫자에 그 의미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2는 하느님의 역사적 선택이 나타난 숫자입니다. 일찍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늘리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요한 6,1-15: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신 때를 “파스카가 가까운 때”(4절) 라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하신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당신께서 행하실 기적을 똑똑히 지켜보게 하시려는 뜻이었다. 즉 증거를 보여주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사람들을 먹일 양식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필립보가 깨닫고 걱정하게 하신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나면 모든 일은 하느님께 맡겨야 하며, 무엇이 모자란다고 당황할 필요는 전혀 없음을 깨달을 것이..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 5,27-33; 요한 3,31-36 / 2022.4.28.; 부활 제2주간 목요일; 이기우 신부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ㄴ). 하느님 사랑의 복음을 유다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하다가 최고의회로 붙들려간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대사제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협박하자 사도들이 응수한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ㄴ). 대사제로 대표되는 당시 유다교는 자신들이 처형한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포하는 사도들에 대하여 매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권력은 자신들이 쥐고 있었지만 유다인들의 민심은 사도들..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요한 3,31-38: 아버지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위에서 오신 분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지니셨으며 아버지의 광채요 모습이시다. 그래서 모든 이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드님을 공경해야 한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3)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다. “그분께서는 친히 보고 들으신 것을 증언하신다.”(32절) 그분은 보고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본성적으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그분 안에 모든 것이 있었고, 모든 것이 아버지의 품에서 완전한 상태로 나오셨기 때문에 당신 안에 이미 가지고 계신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

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사도 5,17-26; 요한 3,16-21 / 2022.4.27.;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 3,19-21). 이 빛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시어 드러내어 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시된 사랑의 진리에 대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범을..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3,16-21: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16절)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감사할 줄 모르고 줄곧 그분의 마음을 상해 드렸는데 그들을 사랑하셨다. 이들을 위해 그분은 다름 아닌 당신의 ‘외아들’을 내 주셨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내놓으셨으며 귀중한 피를 흘리셨다. 그분이 헐벗고 나그네 되었을 때도 우리는 못 본 체했고, 무엇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드님을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두..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갈 것인가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갈 것인가 사도 4,32-37; 요한 3,7-15 / 2022.4.26.;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 받은 이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가 이룩한 공동생활을 전해줍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유, 공동생활을 하는 목표가 다 부활에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유럽 사회 전반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파급시킨 교회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확보되었으나, 신앙이 사사화되고 세속화되는 바람에 성경이 증언하는 공동생활이 어려워지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치권력이 되었고,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신분제도 안에서 상대적 자유를 누린 반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가난했습니..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7절) 위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이 태어남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당신과 함께 머무를 자녀들을 낳으신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말씀과 성사로 태어났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보고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도 성령을 보지 못한다. 어떻게 성령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시편 노래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고 복음 선포가 바로 성령의 소리이며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성령의 소리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 우리가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성령 안에 살고 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다시 태어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