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수성구 2022. 4. 27. 03:52

하느님께서 선교의 주역이신 이유, 四奇之恩

 

사도 5,17-26; 요한 3,16-21 / 2022.4.27.; 부활 제2주간 수요일; 이기우 신부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 3,19-21). 이 빛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보내시어 드러내어 보이신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계시된 사랑의 진리에 대해서,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어떻게 알아들었을까요?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느님의 사랑은 성령을 받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범을 보여준 대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인연에 충실하면서(사도 1,15-26) 서로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나누는 공동생활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사도 2,42-47; 4,32-37). 그리고 사도들은 이렇듯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공개적으로 설교를 하여 수많은 유다인들의 개종을 이끌어 냈고 어떤 경우에는 3천 명(사도 2,41), 또 다른 경우에는 5천 명(사도 4,4)을 입교시키기도 했습니다. 진리에 빛나고 또 예민한 성령의 은총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살아있는 공동체를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유다와 갈릴래아와 사마리아 등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 세우고자 했고, 또 유다인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사방 곳곳에서도 세우고자 동분서주했습니다. 열두 사도들이 마치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필적하는 한 몸처럼 빠름의 은총을 받아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우셔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요 선교사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사도 9,1-31). 이 작전은 소아시아 전체와 종내는 로마제국 전체에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합니다. 성령의 사기지은은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사도들의 몸 게다가 박해자였던 바오로의 몸을 통해서도 발휘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사기지은이 뒷받침된 사도들의 활동을 선교라고 하는데, 하느님께서 이 선교 사도직 활동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감독 겸 주연이셨고, 사도들이 조연이었습니다. 신기한 일들은 많이 일어났는데, 대사제가 사두가이들과 함께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지만 당신의 천사를 시켜 탈옥시키신 하느님의 개입은 베드로가 불구자를 고쳐줄 때에도 일어났고(사도 3,1-10), 다른 사도들의 손을 통해서도 일어났는데 병자들의 치유는 물론 악령을 몰아내는 구마의 기적도 일어났습니다(사도 5,16). 박해를 받는 경우에도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인정을 받았다고 기뻐하는”(사도 5,41) 마음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마귀가 함부로 하느님 일꾼들의 마음을 상하지 못하게 하는 은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들이 빛으로 나아간”(요한 3,21) 선교의 역사는 이 땅에서도 매우 긴박하면서도 극적으로 펼쳐진 바 있습니다. 마테오 리치의 기념비적인 저술인 ‘천주실의’와 판토하의 ‘칠극’이 조선에 유입되어 읽힌 150여 년 동안 숱한 선비들이 읽었지만 유독 이벽만이 천주교 교리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달았고, 그래서 그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양반 중 무반 벼슬을 마다하고 일찌감치 신앙의 길에 정진하는 구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진리에 예민함의 은총입니다. 

 

  그래서 그는 당대에 학문으로나 인품으로 고명하기로 이름났던 양근 선비 권철신을 찾아가서 열흘 동안이나 설득한 끝에 그와 그의 문하 선비들이 실학을 연구하던 주어사와 천진암으로 찾아가서 기어코 그들 모두를 천주학 연구자로 만들더니 결국 천주교 공동체로까지 이끌었습니다.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한국교회가 이런 과정으로 탄생할 수 있었는데, 선에 대해 밝고 빛나는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벽과 동료 선비들은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세례를 받아 오게 한 후에 자신들도 세례를 받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성사 운동을 전개했는데, 한 두 해 사이에 한양에서만 천여 명이 입교하는 기적을 맛보았습니다. 이벽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10명의 선비들은 이벽이 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성사 활동과 교리 교육 활동을 전개하여 몇 년 만에 4천 명의 신자를 얻었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성체성사까지 베풀자 만여 명으로까지 신자들이 늘었습니다. 이것이 천진암 강학회와 이승훈의 세례(1784년) 후 신유박해(1801년)가 일어날 때까지 불과 16년 사이에 일어난 선교 발전이었습니다. 이전 반만 년 역사에서 보지 못한, 빠름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의 빠름입니다. 

 

  이벽이 문중박해를 받을 때에나 동료 선비들이 조정박해를 받을 때에 조상제사금지령으로 인한 혼선이 빚어지기는 했으나 이벽과 이승훈, 정약종, 윤지충과 권상연, 황사영 등은 순교를 선택했고, 정약전과 정약용 등이 유배형을 받기는 했지만 천주교로 인한 진리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배도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는 자산어보나, 여유당전서 등 저술로 교우촌 신자들과 후대의 신자들에게 천주교로 개혁될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서 신앙의 증거를 남긴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치 못함의 은총이 이들 양반 선비들에게만이 아니라 일반 중인 이하 계층의 신자들에게도 두루 풍성하게 내려서, 이후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배교하느니 차라리 심산유곡에 찾아들어가서 교우촌을 세워서라도 신앙의 자유를 누리겠다고 선택하는 소리 없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박해의 칼날도 교우들의 신앙 의지를 상치 못함의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듯 역사적이고 사회적으로 나타난 한국교회의 사기지은 현상은 매우 뚜렷합니다. 이제는 이 빛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