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갈 것인가

수성구 2022. 4. 26. 04:35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여 살아갈 것인가

사도 4,32-37; 요한 3,7-15 / 2022.4.26.;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은 세례 받은 이들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고,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가 이룩한 공동생활을 전해줍니다. 십자가를 짊어지는 이유, 공동생활을 하는 목표가 다 부활에 있습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유럽 사회 전반에 그리스도교 문화를 파급시킨 교회는 또 다른 도전에 직면하였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확보되었으나, 신앙이 사사화되고 세속화되는 바람에 성경이 증언하는 공동생활이 어려워지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정치권력이 되었고, 부자와 권력자들은 사람들을 차별하는 신분제도 안에서 상대적 자유를 누린 반면 대다수의 신자들은 가난했습니다. 평등이 실현되지 않는 종교의 현실에서 신앙의 자유란 빈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유럽식 교회 모델을 다른 대륙으로 옮겨놓는 일이 선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이 위기 속에서 세속화되어 버린 신앙 진리를 쇄신하고자 하는 선각자들이 나타나서 수도회 운동을 개척했습니다. 수도생활은 성경이 가르치는 공동체를 실천함으로써 이를 통해 부활 신앙을 선포할 수 있는 사도직 활동으로 선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자면 공동체를 위한 약속을 해야 했는데, 이것이 세 가지 복음적 덕행이었습니다. 

 

  복음삼덕의 첫째는 순명의 덕행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께 순명하신 것처럼 사도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 순명하였으며, 초대교회 신자들도 사도들을 통해 하느님께 순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순명은 하느님께 대해 우리의 자유를 봉헌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자유를 받아들이시고 그 자유를 더욱 온전하게 성숙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요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입니다. 공동체를 대표하는 장상은 수도회원들이 서원하는 순명의 약속을 받아 하느님께 맡겨둡니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서 주어지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순명 행위가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순명은 복종을 넘어서서 더 큰 자유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결의 덕행입니다. 정결은 회원들끼리 서로 섬기는 공동체의 질서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도로 그리고 신자들은 공동생활에로 일으켜 세우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담대하게 만드시고 용기를 불어 넣어주셨는데 그 첫째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태생적인 이기적 경향을 극복하여 형제적 사랑을 실천할 용기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을 받은 후에 가장 먼저, 유다의 자리를 대신 채울 사람으로 마티아를 뽑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사도 1,15-26). 자신들이 각자 따로따로 불린 처지가 아님을 알고 애초에 열두 사람을 부르셨던 예수님의 역사적 선택을 보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두 지파를 대신하고자 감행하셨던 예수님의 선택은 열두 사도의 공동체로 역사 안에 구현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공동체적인 선택에 따라서, 초대교회 신자들 역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빵을 나누는 일, 즉 미사를 봉헌하면서 한마음이 되고자 예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사도 2,42-47; 4, 32-37). 미사는 영성체를 하는 일 이전에 더 중요한 일이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신자들과 서로 섬김으로써 예수님의 유언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직자들은 동료 사제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고 수도자들은 동료 수도자들을 형제로 받아들이며 평신도들은 자기가 선택한 배우자에게 부부애를 실천합니다. 그래서 정결은 독신생활을 넘어서서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셋째는 청빈의 덕행입니다. 청빈은 자발적으로 자기가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하게 개방하는 태도입니다. 본시 하느님의 소유인 모든 재화를 소유주이신 하느님의 뜻대로 소유함으로써 그 재화가 필요한데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덕목이 청빈입니다. 그래서 청빈의 덕행도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는 일이며, 나누어서 가난해 지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서 청빈은 빈곤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나눔입니다. 


  이 복음삼덕에 대한 서원을 기초로 세워지는 수도생활의 이상과 목표는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었습니다. 수도생활이 교회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까닭은 평신도들의 가정이 성화될 수 있는 모범이 되어 주는 공동생활의 가치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평신도들도, 부부가 하느님께 대해서 순명을, 배우자에 대해서 정결을,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 청빈을 실천함으로써 성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렇듯 복음삼덕은 우리 모두를 사랑 안에서 새로 태어나게 함으로써 부활의 은총을 입을 수 있게 해 주는 해방의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이요, 하느님 나라의 사회적 실체입니다. 또한 이것이 오늘날에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일이 무엇인지를 궁금해 하는 세상의 질문에 대해서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이에 순명하는 것이라고 응답하는 길이요, 인간관계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묻는 세상에 대해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정결의 덕행으로 서로 섬기는 공동체라고 응답하는 길이며, 물질 소유와 가난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 공동체에서 청빈 덕행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는 일이라고 응답하는 길입니다. 

 

  교우 여러분!

순명과 정결과 청빈의 덕행으로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 우리를 들어 올려 부활시키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