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마르코의 메시지

수성구 2022. 4. 25. 04:12

마르코의 메시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구원

 

1베드 5,5-14; 마르 16,15-20 

2022.4.15.;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가 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서라는 문학유형으로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겨준 덕분에 후대 사람들이 그분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사도는 물론 많은 편지를 남긴 바오로 사도도 예수님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는 일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고 따라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그가 해 놓은 것이어서, 그의 업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단 그가 시작하자, 마태오와 루카 그리고 요한까지 마르코 복음서를 보충하여 특색있는 복음서를 남겼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여 다섯 설교를 남겨주었고, 루카는 예수님의 기적들을 더 보충하면서 구약성경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적 의도를 가미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훨씬 더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관점에서 예수님의 신성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마르코가 전해주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매우 역동적입니다. 그분이 복음을 전하시는 장소는 거의 길거리였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만남과 기적이 베풀어진 다음에는 빠르게 다음 상황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메시아로서 예수님의 이미지가 선명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전해진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마르코 복음서 본문이 대략 80여 꼭지인데, 모든 꼭지에서 그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하는 질문을 밑자락에 깔았습니다. 

 

  그래서 형식상 마르코 복음서의 핵심은 8,29에 나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는 고백으로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하게 알아내어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대해 기뻐하시거나 칭찬하시는커녕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함구령의 이유는 나중에 가서 밝혀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을 거두시는 순간에, 낮 열두 시부터 오후 세 시까지 난데없이 어둠이 깔리고 두터운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지는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분의 십자가 처형 작업을 진두지휘하던 로마인 백인대장이 베드로와는 또 다른 고백을 합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그래서 15,39에 나오는 이 대목이 마르코 복음서의 실질적 핵심입니다. 

 

  복음서의 형식상 핵심과 실질적 핵심을 이루는 두 메시지를 종합하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셨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예수님께서 짊어지신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직 그 의미를 모른 채 말로만 정확한 고백을 교과서 같은 대답을 했으니, 함구령이라는 주의를 받았을 뿐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마르코는 자신의 복음서 곳곳에 복선을 깔아 두었습니다. 이는 물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세례라는 메시지가 그 첫 번째입니다(마르 1,8). 물의 세례는 죄를 씻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의 어둠에서 해방되는 탈출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세례는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천국의 빛으로 들어가는 탄생입니다. 그래서 겸손과 희생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물의 세례는 자기가 지은 죄를 없애는 효과가 있지만, 성령의 세례는 남들이 지어 놓은 죄까지도 없애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부르는 또 다른 호칭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십니다. 이를 대속(代贖)이라 합니다. 

 

  마르코는 이 대속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드러내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근거라고 내세운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한 죄를 뉘우치는 일은 당연한 정의입니다만, 남들이 잘못한 죄를 대신 짊어지는 일은 정의를 넘어서는 사랑의 영역입니다. 세상의 착한 사람들도 잘 하지 않으려는 일이지요.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대속의 영성을 사는 길을 시작하셨고, 그 사도들을 통해서 계승되기를 바라셨다고 마르코는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주춧돌 삼아 세워진 교회는 이 대속의 영성을 사는 살아있는 성전이라고 사도들을 잇는 교부들은 풀이하고 있습니다. 

 

  건물로 세워진 성전이 이 대속의 영성을 살지 못하면 한낱 돌무더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사람들로 꾸며진 공동체가 이 대속의 영성을 살아내면 그 공동체는 성령께서 사시는 궁전이 될 것이라고 이미 사도 바오로가 가르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자 다른 이들이 짊어지워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는 생애를 사셨기에,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이신 것이고 하느님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신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사생활도 자기 십자가를 감당하는 데에만 지향을 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짊어지워준 십자가를 감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공동선을 위한 십자가까지도 짊어지기 위한 대속의 영성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십자가가 부활의 조건이라기보다는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는 대속의 영성이야말로 이미 부활을 살고 있다는 구원의 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