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써서 보내어라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써서 보내어라( 묵시 1,10)
사도 5,12-16; 묵시 1,9-19; 요한 20,19-31
2022.4.24.; 부활 제2주일;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부활 제2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면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부활 신앙이야말로 우리와 교회와 세상이 다 함께 하느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길임을 상기시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타내 보이신 하느님의 자비는 첫째, 제자들을 사도로 일으켜 세우신 일과, 둘째 그 사도들의 변화에 힘입어 신자들도 공동체를 이룩한 일을 들 수 있습니다. 나약한 믿음과 비겁한 마음을 지니고 있던 제자들은 담대한 믿음과 용감한 마음을 지닌 사도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사도들로부터 부활의 거룩한 변화를 지켜본 신자들 역시 자기중심적 이기심과 자기소유에 집착하던 욕심을 버리고 서로가 한마음이 되고자 노력하고 저마다 가진 것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을 수 있는 변화를 이룩하였습니다(사도 2,42-47; 4,32-37). 이렇게 하여 사도들과 신자들이 이룩한 공동생활이 초대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입은 자비의 사회적 실체였습니다.
3. 초대교회의 이 공동체적 활력은 한 세대 가량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의 여러 곳에서 시작되었다가 유다교의 박해와 로마제국의 예루살렘 침공으로 인하여 소아시아로 옮겨갔습니다. 부활로 인한 하느님의 자비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으로부터 소아시아로 이동하고 퍼져나간 경위를 사도행전이 증언해 주고 있고, 소아시아에 흩어져 있던 일곱 교회가 로마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이 공동체로 나타난 하느님의 자비를 증거하다가 끝내 로마제국 전체를 복음화시키게 된 경위를 요한 묵시록이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4. 제자들이 사도들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부활 신앙에 눈을 뜨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 과정에서 토마스가 수행한 활약에 대해 전해 주고 있습니다. 한때 토마스는 불신앙의 표본으로 간주되기도 했었지만, 이제 와서는 합리적 부활 신앙의 본보기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합리적 의심을 추구하되 확인한 다음에는 철저하게 믿어야 하는 신앙의 전통을 토마스가 세웠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부활대축일을 지내고 나서도 팔일 축제로 지내는 이유 또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자리에 마침 공교롭게도 토마스가 없었고, 그래서 토마스를 위해서 여드렛만에 다시 나타나셨던 연유에서 기인합니다.
5. 인류가 찬란한 물질문명을 이룩했지만, 아직도 사람들끼리 맺는 인간관계에서나 물질을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질서에서 공동체를 이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체주의적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물론, 개인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그렇습니다. 우상숭배자들이나 무신론자들만이 아니라 신앙인들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공동체라는 진리에 견주면, 아무리 위대한 발명품이라도 물질문명의 여러 진보들은 그 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아무리 현재의 민주주의 체제가 이제껏 인류가 실험해 온 모든 정치 체제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너무나 많은 허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문명의 모든 진보는 인간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서 이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들이 서로 갈라져 대립하거나 경쟁하기보다 서로 도와서 연대해야 하며, 인류에게 주어진 물질 환경을 수탈하거나 독점하지 말고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룩해야 합니다. 실로, 하느님의 자비야말로 진보의 목표이며, 공동체는 그 목표의 사회적 실체입니다.
6. 초대교회는 박해 속에서도 이런 공동체의 금자탑을 세웠습니다. 유다교 최고의회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공동체를 억압하여 스테파노와 큰 야고보를 죽였으나, 이 박해는 역풍을 불러 일으켜서 신자들을 안티오키아와 소아시아로 흩어지게 하는 선교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소아시아로 간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과 마주쳤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참이스라엘로 자부하면서 자신들을 옛이스라엘로 폄하하는 데 격분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당국에 고발하여 박해를 의도적으로 불러 왔습니다. 로마 당국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제국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살아있는 사람인 황제를 신격화시켜 숭배하라고 강요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배격했습니다. 유다인들도 자신들의 신앙으로 도저히 황제 숭배를 용인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시기와 미움에서 이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를 불러들이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7. 오늘 제2독서인 요한 묵시록 1장의 말씀은 이렇게 박해로 고난받는 소아시아의 초대교회 공동체들에게 사도 요한이 성령의 계시를 받아 편지를 써 보낸다는 내용입니다. 소아시아에는 에페소, 스미르나, 페르가몬, 티아디라, 사르디스, 필라델피아, 라오디케이아 등 일곱 공동체들이 서 있었지만, 이들 말고도 콜로새, 히에라폴리스 등 작은 공동체들도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성서적 묵시문학의 표현으로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기 때문에, 위의 일곱 공동체들만이 아니라 모든 공동체들에게 열려진 숫자입니다. 사도 요한에게는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영원무궁토록 살아계신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을 파트모스 섬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성령의 이끄심에 이끌려 듣고, 묵시록을 통해서 당시의 일곱 공동체는 물론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전해주는 것입니다.
7. 결국 사도 요한의 격려에 힘입어 용기백배한 신자들이 순교를 각오하고 이룩한 공동체의 힘이 로마 제국이 자행한 이 250년의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이 공동체가 발산한 매력에 끌려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로마인들이 점차 늘고, 또 더욱 결정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자들을 미워하지 않고 복수도 하지 않으며 고매한 인품과 형제적 사랑으로 신앙을 증거했기에 종내는 그리스도 신앙을 공인하고 국교로까지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신앙 공인과 국교화 이후에 숨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신앙의 본질인 공동체화를 배우지 않고 신앙의 형식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가 로마제국을 복음화시킨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교회가 로마제국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조직과 제도가 가톨릭교회에 들어왔고, 매사에 대해 논리로 분석하고 이원론에 따라 생각하는 그리스 사유로 부활 신앙을 설명하는 교리 방식이 들어왔습니다. 그 결과, 부활은 육신의 부활로 국한되고 내세 이후로 유보되었으며, 공동체는 천상에서나 가능한 신비로 미루어져버렸습니다. 가진 것을 공동의 소유로 내어놓고 공동으로 사용하던 전통은 부자들의 자선에 내맡겨졌으며, 함께 기도하는 전통 역시 수도회의 고유한 몫으로 넘겨졌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지금 여기서 살면서, 공동체를 이루고, 가난한 이들에게 헌신하는 삶은 간헐적으로 출현한 성인 성녀들의 몫이었습니다.
9.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천5백년이라는 시대 간격을 극복하고 다시금 초대교회의 활력을 온 교회가 되찾기를 염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공의회의 주제가 되고,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가 부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현존 양식을 말씀과 성찬과 사랑의 섬김으로 균형있게 바로세운 일도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던 요한 23세 교황의 지향이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초대교회에서처럼 공동체를 이루고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나누게 되면, 영적 매력을 발산하게 되고 사회적 존경을 받게 됩니다. 선교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체적 질병이야 의료 기술로써 고쳐야 하겠지만, 현대인들이 만성적으로 앓고 있는 이기심과 욕심의 정신적 질병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나누면서 공동체를 이룬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들을 통해 나타난 많은 표징과 이적들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예수님과 성령께서 그렇게 일하십니다.
10. 창세기는 성경의 첫 책이고 묵시록은 마지막 책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원죄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이 닫혀버린 인류는(창세 3,24), 부활 신앙의 기운으로 가득 찬 초대교회의 신자들에게 그 길이 다시 열렸다는 소식을 듣습니다(묵시 22,19). 이것이 요한이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성경 메시지의 알맹이입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는 한처음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이 육화되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사회적 실체가 바로 한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사도 토마스가 보여준 행동처럼,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복음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이 과연 살아날 수 있는지 따져보고 납득이 가야 믿겠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일치하는 인간관계속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고 나누는 생활양식이 공동체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따져 물을 수도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실제로 이 공동체와 그 생활양식이 가능함을 보여주시면, 그때에는 철저하고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전해야 합니다. 일단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믿는 이들이 성경이 증언하는 공동체를 실제 행동으로 이룩해 보이고 나면, 그때에 가서는 믿음이 약한 이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굳이 보지 않고도 그분의 부활을 믿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한 하느님의 자비가 온 누리가 퍼져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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