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 다해 (하느님의 자비 주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부활 제2주일: 다해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스의 불신앙이다(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 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라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참조: 창세 2,7; 에제 37,9)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스 사도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은 토마스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스의 정신자세를 더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때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 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고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다(참조: 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과 놀라운 일들을(사도 5,12)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때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주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묵시 1,13)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묵시 1,18).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분을 증거해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오늘은 부활 후 필부축제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날이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부활로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기 위하여 매일 매 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그 부활의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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