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신앙과 창조 신앙
사도 4,1-12; 요한 21,1-14 / 2022.4.22.;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이기우 신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부활의 눈으로 이전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고, 부활의 언어로 향후 미래를 새롭게 선포하도록 우리를 재촉하십니다. 18,19세기 한국인들은 한자와 한문에 이런 생각을 구겨 넣어서, 부활 이전의 모든 역사를 선천개벽(先天開闢)의 현실이라 하고, 부활 이후의 역사를 후천개벽(後天開闢)의 미래라 하며 부활의 위력에 대해 경탄하였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창조의 뜻도 새로워집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한처음이 시간 속으로 강생 부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타볼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불러내시어 세 제자에게 빛나는 얼굴로 변화되신 모습을 보여주신 뜻(마르 9,2-10)도, 또 열한 제자를 모아놓고 하늘과 땅의 전권을 받았으니 부활의 복음을 전하라고 분부하신 뜻(마태 28,18-20)도 다 여기에 모아집니다.
개별 사도들을 둘러싼 많은 신앙인들의 네트워크가 작동되었고, 이 연결망을 통하여 각성된 개별 신앙인들의 연대와 통공이 시작될 수 있는 배경과 바탕이 여기에 있습니다. 현실의 혼돈은 의로운 변화를 원하는 부활 신앙 세력의 도약대입니다. 선교의 풍어 기적이 기다리고 있었고, 태생 불구자처럼 현실 개혁의지나 역사 창조의지가 무기력했던 이들이 일어서고 걷기도 하며 뛰기까지 하고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리하여 복음화된 문명은 구체화된 마법의 숫자 153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기적과 선포한 복음의 결과로 장정만도 오천 명이 넘는 유다인들이 믿게 된 것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제국이 박해를 멈추고 신앙을 공인하며 국교로까지 승인하게 된 현실적 변화도 또 다른 153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어 소아시아로 건너간 초대교회의 신앙 공동체들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하느님의 섭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실현되었다는 감격과 확신에 차서 박해를 이겨내고 오히려 박해하던 로마 문명을 복음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한민족이 살던 땅에서도 부활의 위력은 놀라웠습니다.
민족 최초로 지성으로 신앙을 받아들인 선비 이벽은 이승훈과 함께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명례방 활동으로 한양에서만 천 명의 입교자를 얻었습니다. 그 동료들이었던 강학회 선비들은 이벽이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나자 명륜동과 회현동에 꾸린 자발적인 성사조직으로 그 노력의 뒤를 이어 4천 명으로 신자를 늘렸고,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강완숙 골롬바와 정약종의 노력으로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만 명으로 신자가 늘어났습니다.
이 복음의 씨앗으로 피어난 신앙의 꽃, 한국의 초대교회는 박해시대 교우촌입니다. 이 신자들이 백년의 박해라는 역경을 물리치고 오히려 늘어만 갔던 교세 신장의 비결, 치명자 뒤에 더 많은 신자들이 순교정신을 이어받고 있는 교회의 신비도 결국 핵심은 부활 신앙의 위력입니다. 이 힘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성령의 사기지은과 마법의 숫자 153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은 밤새 허탕을 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풍어 기적을 체험시키신 오늘 복음으로 우리의 묵상을 이끌어줍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가 전하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태생 불구자의 기적을 다시 상기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불구의 상황 때문입니다. 한국은 경제대국의 길을 걸으며 문화강국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만은 당면한 공동선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는 후진국 수준으로 주저앉아 있어서 불구자 수준입니다. 허무맹랑한 무속과 주술이 판을 치고 있어도 부활 신앙을 믿는 신자들이 손을 놓고 있는 형국도 불구자 수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실을 외면하는 언론이나 정의를 내동댕이친 검찰을 보고 있으면서도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이 구경만 하고 있는 사태도 불구자 수준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과 공직자들이 공동선을 외면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백 년 전에 뼈저리게 겪고도 아직도 기득권 카르텔은 공동선 대신에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신앙인들과 교회가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외신 기사를 봐야 한국의 본 모습을 진단할 수 있는 이상한 나라, 지금의 대한민국입니다.
이제 마법의 숫자 153이나 풍어의 기적은 이미 5백만이라는 숫자를 찍은 이상 더 이상 신자가 늘어나지 않아도 이미 세례받은 신자들이 깨어나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불구자 신세를 일으켜 세우고, 걷게 하며, 뛰게 해서 결국 하느님을 찬미하는 데까지 이르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얻어지리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입니다.
교우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의 사기지은과 풍어기적으로 제자들을 사도들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온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창조하시고자 하신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 깃발을 따라서, 기묘한 섭리로 이 땅에 그리스도 신앙을 진리로 알아보고 기꺼이 목숨 바쳐 길을 닦으신 신앙 선조들의 바람 역시 우리 나라를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의 새 땅으로 높이 세우고자 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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