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수성구 2022. 4. 21. 06:11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사도 3,11-26; 루카 24,36-48 / 2022.4.21.; 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 이기우 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당신 부활이 실제 일어난 현실임을 믿게 하시는 것과,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삼을 사람을 찾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그 증인과 성령의 사기지은으로 함께 현존하시는 것,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알려주듯이, 우선 예수님께서는 여인들과 엠마오 제자들 그리고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이 당신의 부활을 믿게 하시고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셨으며 그들이 부활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사기지은으로 함께 현존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는 그렇게 하여 부활을 믿게 된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있는 ‘솔로몬 주랑’에서 태생 앉은뱅이 불구자를 일으켜세우고 걷고 뛰며 하느님을 찬미하도록 기적을 베푼 일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활의 믿음으로 새롭게 바라보게 된 이스라엘의 역사도 재해석해서 들려줍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예수님도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그에 관한 기록입니다. 전반부는 열한 제자가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을 베드로를 대표로 내세워서 기록하였고, 후반부는 바오로가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열한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들에게 믿음을 일깨워주시고 부활 증인으로 삼으신 일도 기적적이지만, 박해자였던 바오로를 돌려세우시고 당신 부활의 증인으로 삼으신 과정도 기적적입니다. 교회의 초창기 역사가 이렇게 해서 이룩되었습니다. 

 

  이 역사는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증언한 찬란한 기록으로만 채워진 것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던 세력들이 이 증인들을 박해한 기록으로도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천지가 창조되던 한처음에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위를 감돌고 있는”(창세 1,2) 혼돈 현상의 반영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창조가 예수 부활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모든 과정에서도 이 혼돈 현상은 어김없이 따라다닙니다. 보편교회의 역사 2천 년 동안도 그러했고,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예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현대인들이 믿는 이들보다 더 많으며, 부활시기에 들어선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도 예수 부활을 믿기는 하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신자가 제법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본질은 똑같은데 차이는 시간이 흘렀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시간이라는 차원을 초월해서 성령의 사기지은으로 움직이시는 존재이시므로,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혼돈 현상에서도 여전히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활약상을 보여주고 계심을 우리가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활 시기에 부활에 관한 복음과 독서를 읽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에게 평화의 인사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혔던 손과 발을 보여주시듯이, 상처 입은 이들의 현실 안에서 평화를 선포하도록 이끄십니다. 상처 없는 몸이 진정한 예수님의 부활 몸일 수 없듯이, 현실 사회의 약자들이 겪고 있는 상처를 외면해서는 진정한 부활의 발현 체험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는 이들이나 배운 이들의 관념 속에서만 가능한 가상 현실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십니다. 마치 구운 물고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잡수시듯이 그렇습니다. 먹고 입고 자는 기본 의식주의 생활을 비롯해서 생각하고 느끼며, 말하고 글쓰며, 너나 없이 고르게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도약대로 해서만 부활은 증언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열한 제자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 주셨듯이, 우리도 비로소 신구약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실로 성경은 부활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보아야 제대로 그 의미가 나타나는 진리의 창고입니다. 이 진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시피, 서양인들의 논리와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말 것이 아니라 동양인들의 눈으로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와 현실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중심으로 해설하는 교회의 교리도 서양인들의 논리-분석적인 사고방식으로만이 아니라 직관-종합적인 사고방식으로도 보완되어야 할 필요가 그래서 있습니다. 태생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뛰고 더구나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그렇게 논리-분석적 사유와 직관-종합적 사유가 합해져서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나옵니다. 

 

  부활은 우리가 세례 받을 때 약속된 새로움의 은총이 실현되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이 되고, 교회는 새 하느님 백성이 되며, 교회가 만나는 민족 사회는 새 인류로 초대받는 계기가 부활입니다. 태생 앉은뱅이처럼 걷지도 뛰지도 못하던 불구자와도 같은 혼돈스런 현실이, 일어나 걷고 뛰며 심지어 하느님을 찬미할 수도 있는 르네상스의 창조적 현실로 변화되는 것이 부활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기를 되찾게 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새로운 창조, 이것이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부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