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수성구 2022. 4. 29. 05:03

먹고 남긴 빵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사도 5,34-42; 요한 6,1-15 / 2022.4.29.;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기념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에 나타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신 포석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빵의 기적에서 장정만도 5천 명이나 되는 많은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었다는 행적에 깔려 있었습니다. 153이라는 숫자가 선교의 성과가 풍요로울 것임을 암시하는 마법의 숫자라면, 이 마법을 가능하게 해 줄 필수 조건은 12라는 숫자에 그 의미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12는 하느님의 역사적 선택이 나타난 숫자입니다. 일찍이 밤하늘의 별이나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후손을 늘리는 축복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느님께서 실제로 후손 증가의 계기로 삼으신 일이 야곱의 열두 아들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열두 아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450여 년 동안 열두 지파로 늘어났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는 각 지파별로 토지를 분배받아 더 큰 집단으로 자라날 수 있는 토대를 쌓았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임금들과 대신들, 사제들과 학자들 등 이스라엘 민족의 엘리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어겼습니다. 주변 강대국들의 우상숭배 풍조에 물들어 끝내 또 다시 바빌론으로 종살이를 하더니, 한번 쇠약해진 국력이 회복될 틈도 없이 그리스계 헬레니즘 세력, 로마 세력에 연이어 지배를 당하는 동안 이 열두 지파의 혈통은 레위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남기고서는 거의 다 끊어지고 섞여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정신도 쇠약해지고 혈통도 보잘 것 없어진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께서 새로이 열둘이라는 역사적 선택을 제자들로 감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정작 제자들 자신은 그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당사자들도 자신들이 예수의 제자로 불리었다는 뜻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공생활 3년 내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부활하신 스승께서 수 차례나 발현하셔서 과거의 가르침을 상기시켜 주시기도 했고, 성령까지 보내주셔서 믿음도 담대해 질 수 있었고, 기억도 생생해 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양심도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서 담대한 믿음으로 생생해진 기억을 되살려 공개적으로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고 다니자 많은 군중이 이에 호응했고, 가말리엘이라는 당대 저명한 율법학자마저 이를 거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최고의회의 대세가 이렇게 기울어지자 대사제도 하는 수 없이 더 이상 사도들을 박해하지는 못했지만 풀어주기 전에 매질한 다음 놓아주었습니다. 마음속으로는 얼마든지 죽이고 싶도록 박해하려던 흔적이지요. 그런데 그 억울한 매질을 당한 사도들의 마음가짐이 주목할 만합니다. 사도들은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하며 물러나왔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과 기준으로는 도무지 기뻐할 수 없는 일인데, 사도들이 기뻐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과거의 제자들과는 완전히 딴판으로 새로운 인간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새로운 인간이 되었는가? 그것은 과거 스승으로만 모시던 예수님을 이제는 자신들의 주님으로 모실 정도로 새로운 인간입니다. 과거에 스승에게 빚진 마음을 이런 매질 당함의 모욕으로 털어내고 싶을 정도로 도덕적 부채 의식이 생겨난 새 인간으로 거듭 났음을 뜻합니다. 예수와 사도들은 한 몸처럼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빵의 기적에서 남은 빵 조각으로 채워진 열두 광주리의 숨겨진 의미였습니다. 

 

  물고기든 빵이든 기적은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일으켜 주실 수 있습니다. 그 수효가 153마리든 5천 명도 넘는 많은 군중이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가 되는 기적의 필요조건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켜 주실 만한 파트너가 열둘이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그 열둘은 믿음으로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기적의 충분조건인 은총은 하느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얼마든지 선교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필요조건인 사도들의 믿음과 일치가 변수라면 충분조건인 하느님의 은총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성령의 사기지은입니다. 변수의 비중은 겨우 1%요, 상수의 비중은 무려 99%나 되지만, 이 둘을 합해야 100%가 되기 때문에 99%의 상수를 믿는 믿음과 1%의 변수를 채우려는 노력이 다 필요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생각나는 예수님 말씀이 있어서 들려드립니다. 하나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마태 18,19-20) 이라는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요한 14,12) 이라는 말씀입니다.

 

교우 여러분, 열두 광주리를 채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