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묵상글 나눔 3032

불편한 행복

불편한 행복 불편한 행복 마르코 복음 2장 18-22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저와 함께 예비자 교리를 하시고 세례를 받으셨던 나이 지긋하신 형제님이 세례 후 한 달 만에 저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신부님, 세례 받은 거 물리주이소!” 그래서 저는 “고객님, 교환과 반품은 되지 않습니다. 제가 품질보증을 했으니 제가 AS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며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습니다. 하시는 말씀이 세례 받고 나면 정말 편안하고 좋을 줄 알았는데 불편해서 못 살겠답니다. 예전에는 내키는 대로 편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도 떠오르고, 복음과 교회의 가르침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불행하냐고 했더니 행복하긴 한데 불편하다고 하시기에 그러면 잘 살고 계시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랜 ..

사랑 그 깊음에 대하여

사랑 그 깊음에 대하여 사랑 그 깊음에 대하여 마르코 복음2장 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 ABO식 혈액형 이론은 사람의 성격을 4가지 혈액형으로 파악하고 분류한 것인데 재미삼아 하다보면 어느 정도 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각자 고유한 존재들인데 이렇게 유형을 나누고 또 그 방법에 마음이 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누군가를 쉽게 판단하는 것으로 편하고 쉬운 것을 선택하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저런 사람이라고 판단하고 나면 더 이상 고민할 것이 없어지고 갈등도 사라집니다. 반 대로 한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 어렵고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일입니다. 그 어려운 길을 피하기 위..

통공의 보속

통공의 보속 통공의 보속 마르코 복음2장 1-12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보냈다. ​ 고등학생 시절 신학생인 형과 종종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 시절 편지 중 왜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지 끔찍하고, 아프고, 혼란스러운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이 시대가 곧 무너져내릴 것 같다며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형에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물음에 형은 그것은 바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의인 열 명 때문에 버티는 세상 (창세 18,32 참고)이기 때문이라고 적어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이야기로 마무리했습니다. 그 의인 열 명 중 두 명이 너와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들의 의로움이 우리들과 세상의 죄를 보속하고 있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기..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 마르코 복음 1장 29-39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 누구에게나 떠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제로 살아가면서 소임지를 떠나는 발걸음이 대개 그랬습니다. 물론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사람이 떠나고 남음이 큰 일은 되지 않겠지만 사람의 마음이 쉽게 정리되지는 않습니다. 본당을 나타내는 그리스어 파로이키아parochia는 나그네를 의미합니다. 그분을 떠나 세상에 나와 다시 그분께로 가기 위해 나그넷길을 걷는 우리들의 신원을 드러내줍니다. 오직 하나 주님의 명에 의해 버리고 없어지고 사라져야 하는 우리 삶의 모습을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약한 우리네 인생에는 머물고자 하는 때와 사람, 그리고 공간이..

무관하지 않는 신앙

무관하지 않는 신앙 무관하지 않는 신앙 마르코 복음 1장 21ㄴ-28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 막 신학교에 입학한 제게 조금 어려웠던 일은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라는 교수 신부님들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미 친형이 있었기에 피붙이 형제도 형제, 처음 본 사람도 형제라고 부르라는 것의 무게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형제라고 부르는 그 무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우리가 형제라 부를 수 있는 관계를 확장해 더 넓고 더 깊은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고 서로의 성장을 돕는 작은 고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타인의 고통, 누군가의 상처와 아픔, 고민을 나와 무관한 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상대방을 가르고 나누며 나와 관계없는 일이라 치부합니다. 더러운 영이..

꿈을 꾸는 사람들

꿈을 꾸는 사람들 꿈을 꾸는 사람들 마르코 복음 1장 14-20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 동료 사제와 수도자들과 신자들에게 꿈을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답을 듣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스스로가 품고 있거나 바라는 꿈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꾸지 않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가 있는 교회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제자들은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무모하리만큼 기꺼이 가진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별 볼일 없는 삶일지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부르신 그 꿈에 함께하기 위해 온전히 자신을 내려놓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꿈을 꾸었던 그 사람들로 인해 구원사업이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삶은 그제야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분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요한 복음 3장 22-30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 제 친구는 저보다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습니다.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고 그림까지 잘 그립니다. 좋은 학교를 나왔고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좋은 집도 장만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닐 때에도 늘 주목을 받는 건 제 친구의 몫입니다. 제 친구가 부럽지 않냐고요? 질투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의 친구를 보라고 했습니다. 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이렇게 멋있고 흠 없는 사람이니 저에게도 자신감이 생깁니다. 나도 썩 괜찮은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새로 등장한 예수님 때문에 질투가 났습니다. 많은 사람..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니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니 네가 진짜로 원하는게 뭐니 루카 복음 5장 12-16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 본당에 부임한 후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신부님, 이것 좀 해 주세요.”와 “이건 안 했으면 좋겠어요.”입니다. 본당의 성사 생활을 비롯한 운영 전반에 관해 다양한 의견과 요청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꼭 해야 하는 일도 있지만 사정상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설명해드릴 수 없어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주임 신부는 본당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단 본당 신부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어쩔 수 없이 무엇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사랑은 그것..

예수님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마르코 복음 6장 34-44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예수님은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굶주린 그들을 차마 그대로 돌려보내실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분주하게 움직여 이것저것 끌어모아 그들의 배를 채워주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그 일을 하셨습니다. 굶주린 군중에게 예수님이 필요했듯이 예수님께는 제자들이 필요했습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빵을 가져오게 하셨고, 제자들에게 군중을 한 무리씩 자리 잡게 하셨고, 제자들에게 빵을 떼어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고, 제자들에게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게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모두 보여주십시오

모두 보여주십시오 모두 보여주십시오 마태오 복음 2장 1-12 본당에 부임한 후 처음 맞은 새해 아침이었습니다. 청소년들이 세배를 하러 온다기에 세뱃돈도 준비하고 집안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우와~ 엄청 크다! 신부님 집이 왜 이렇게 좋아?” 제 방에 들어온 아이들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준비한 세뱃돈의 절반만 줬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모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아이들이 돌아간 뒤 제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부유함에 익숙해진 내 눈은 가난하게 살지 않는 나의 삶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내 눈은 타인에겐 냉정하지만 나 자신에게는 한없이 너그럽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