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4569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의지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의지 에제 36,23-28; 마태 22,1-14 / 연중 제20주간 목요일; 2022.8.18.;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밝혀주었습니다. 이로써 하느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당신의 경륜을 펼치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이 백성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가로막았고,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까지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모자라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으니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인류 구원을 위한 계획을 알려주시며 이에 협력할 파트너십을 요청하시고자 숱한 예언자들을 보내신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합니다. 한민족에게는 보내지 않으..

하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

하늘 나라의 포도밭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 에제 34,1-11; 마태 20,1-16 /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2022.8.17.; 이기우 신부 교회는 하늘 나라의 포도밭입니다. 세상에서도 목자들은 양 떼를 잘 보살펴야 하거니와 교회라는 포도밭에서 목자들은 더 그렇습니다. 양 떼를 돌보지 않는 목자들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대적하시고 내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몸소 목자가 되시어 양 떼를 돌보십니다. 하늘 포도밭에서 목자이신 하느님께서 가장 많이 신경쓰시는 것은 모든 양 떼이자 일꾼인 신자들이 빠짐없이 최소한의 몫을 나누어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늦게 와서 일을 적게 한 일꾼에게도 최소한의 몫은 챙겨주십니다. 물론 먼저 와서 일을 더 많이 한 일꾼들에게는 기쁨과 보람이라는 성과급 수당을 더 가져가게..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부자들의 이야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부자들의 이야기 에제 28,1-10; 마태 19,23-30 /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2022.8.16.; 이기우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에게 아주 실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집이 큰 낙타가 작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이치가 너무나 뻔한 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선언하다시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시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라난 청년이 윤리적으로도 흠결없이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청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말씀 한 마디에 실망해서 돌아간 이야기 끝에 나왔습니다. 그 말씀 한 마디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9,23-30: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려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성모 승천 대축일 / 정용진 요셉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 정용진 요셉 신부 오늘의 묵상 대형 유람선을 탄 승객들은 그들이 어디로 가는지보다 그날 식단과 놀 거리에 더 관심을 보인다고 합니다. “영원성을 삭제하면 지평선은 언제나 좁게 보인다.”라는 어느 이탈리아 주교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먼 미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들립니다. 그들에게는 올여름에 어디 갈 것인지, 돌아오는 금요일에는 어떤 클럽에 갈 것인지, 오늘 저녁을 먹고 나면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흥미로운 관심사입니다. 이런 현상은 어른들 탓이 큽니다. 어른들의 생각과 삶 속에서 점점 ‘힘들지만 참는다’, ‘영원하다’, ‘결정적이다’ 등과 같은 말이 사라졌고, 그 영향이 젊은이들에게서 보이는 듯합니다..

성모 승천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모 승천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모승천 대축일 오늘은 육신과 영혼이 함께 영광을 받으신 동정 마리아의 승천 대축일이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마리아에게서 결정적으로 완성되고 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에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마리아의 영광은 마리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될 일의 표징으로 우리에게 기쁨과 희망을 준다. 언제나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다. 바오로는 마리아도 모든 인간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부활을 얻는다고 말한다. 마리아와 우리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마리아는 죽음의 지배를 전혀 받은 분이 아니다. 죄가 마리아를 스쳐 가기조차 하지 않았다. 마리아에게 있어 마지막 원수(1코린 15,26)는 이미 원죄에 물들지 않은 잉..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 참 좋은 도반들 - 연중 제20주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 참 좋은 도반들 - 연중 제20주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2022.8.14.연중 제20주일 예레38,4-6.8-10 히브12,1-4 루카12,49-53 하느님의 ‘살아 있는 보물 창고’ 수도공동체 -참 좋은 도반들-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시편84,10-11ㄱ) 어제는 참 행복했던 날이었습니다. 색다른 깨달음 때문입니다. 수도공동체가 순간 “살아 있는 보물 창고”라는, 또 수도형제들이 “참 좋은 도반들”이란 깨달음에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오늘 주일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또 여러 수녀님들이 내일 성모승천대축일을..

연중 제20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일 : 다해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된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

미래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할 진리

미래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할 진리 에제 18,1-32; 마태 19,13-15 / 연중 제19주간 토요일; 2022.8.13.; 이기우 신부 독서와 복음에서 들려주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세대를 넘어서서 전해지고 실현되어야 할 진리의 시간적 차원에 대해 일깨워줍니다. 선대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포로로 끌려와 있는 바빌론에서 에제키엘은 죄의 무게는 죄를 저지른 당사자와 당대에만 영향이 미치는 것이지 어린 세대와 미래 세대는 책임이 없음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다음 세대에까지 죄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경우는, 자유를 선용하지 못하는 바람에 같은 죄를 저지르는 경우뿐입니다. 이것이 원죄의 영향력이요, 미래 세대의 무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에제키엘은 “어떤 사람이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