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20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8. 14. 05:17

연중 제20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20주일 : 다해

복음: 루카 12,49-53: 나는 평화가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일생을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 예레미야는 고통과 권세를 갖추신 그리스도의 예언적 모습이 된다. 그는 자기 백성들로부터 반대를 받는 표적으로 나타난다. 참된 예언자는 헛된 환상이나 감언이설에 동조하지 않고 그와는 정반대로 그 상황을 새롭고 대담한 말로써 판단하여 많은 사람에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마침내 대립과 불화의 상징으로 된다. 예언자들의 삶이 그러했다면 예언자 중의 예언자이신 그리스도의 운명이 더 나을 수 있을까?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의 예언적 행동을 말해주는 말씀이 있다.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49-50절) 불과 세례의 의미는 그분의 수난을 의미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은 완전히 살라버리고, 정화하는, 강렬하게 타오르는 ‘불길’로 설명되기도 하고, 고통과 죽음의 물속에 잠기는 행위로써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이다(시편 124,4-5 참조).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비록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구원을 성취해 마치 성령에 의해 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처럼 그 구원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강한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인간은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반대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 때문에 가족들 간에도 충돌이 일어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51절) 이제 그분의 말씀을 선과 악, 진리와 허위를 가려내는 척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다른 가치와 판단의 척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대립하는 것은 당연하다.

 

예수님의 그 말씀은 믿음과 믿음을 통해 그분과의 생활한 일치를 통하여 내적인 평화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자체로 우리 마음 안에 커다란 ‘전쟁’ 즉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이 내적 전쟁을 통하여 모든 것을 극복하는 가운데 우리 안에 진정한 평화 즉 구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내적 전쟁은 전쟁이며 갈등이지만 범죄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의무이다. 이 갈등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갈등을 계속해서 극복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생명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 갈등을 이겨내고 극복하게 될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참 평화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 이끌어 주실 것이다.

 

히브리 서간에서도 비록 희생을 통해서이지만 충실성과 사랑으로 찬란히 빛나는 표징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히브 12,2) 그리스도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2,4)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가면서 언제나 부딪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상이라는 가치 기준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끝까지 선택한 하느님의 뜻은 평화와 구원을 받게 하였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다면 그분의 형제자매인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해 나가는 삶을 결심하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