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내가 바라는 것은 신의요 예지다

수성구 2022. 8. 12. 06:43

내가 바라는 것은 신의요 예지다

에제 16,1-63; 마태 19,3-12 / 연중 제19주간 금요일; 2022.8.12.; 이기우 신부

 

  오늘 독서인 에제키엘 예언서 제16장은 예루살렘을 의인화시켜 풀어놓은 유배 이전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백성은 신앙의 계약을 맺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고, 에제키엘은 이 역사를 부정한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역사로 회고합니다. 버려진 아기가 왕비가 되기까지, 숭고한 사랑과 저속한 불륜이 나란히 등장하는, 그래서 읽기도 듣기도 거북스러운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충실함에도 불구하고 변함없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일깨워주고자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겪어야 했던 바빌론 유배생활은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금 하느님께 돌아오기 위해 정화되어야 하는 속죄의 기간이었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비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 남자들은 훨씬 더 완고했습니다. 결혼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거나 불륜의 혐의만 보여도 그 아내를 버려도 좋다는 사고방식을 예수님께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제로 불륜은 아내의 경우보다 남편에게서 더 많이 벌어질 가능성이 큰데도 그러했습니다. 

 

  이 매정하고 위선적인 세태를 드러내는 얄궂은 질문이 바로,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도덕적 흠결을 핑계로 이혼을 정당화하려고 던지는 이 질문에 바리사이들의 마음속이 뻔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러자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에 관한 창조주 하느님의 계획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창조주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는 부모를 떠나 혼인하면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혼인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혼인한 남자와 여자는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거친 세파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부부가 힘을 합해도 헤쳐 나가기 쉽지 않은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그래서 정상적으로라면 바리사이들은 험난한 세상살이에서 부부가 일치를 깨뜨리지 않고 헤쳐 나갈 수 있는 지혜를 물었어야 했습니다. 질문이 허접하다보니 예수님의 답변도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혼인 결합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제한적인 말씀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만, 혼인에 관한 제대로 된 질의가 나왔었더라면 남자와 여자를 부부로 맺어주신 하느님의 은총을 더 강조하시는 말씀이 나왔을 것입니다. 부부가 자신의 사랑으로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맺어졌음을 잊지 말아야만 그 은총으로 세파를 함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결혼을 남편과 아내의 양자계약으로 보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남편와 아내와 하느님 사이의 삼자계약으로 봅니다. 부부의 사랑 사이에 하느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 가치를 따져 교환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인격체라는 현실은 사랑하는 남녀가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결합될 때 빛을 발합니다. 그렇게 하느님 안에서 맺어진 부부라야 그 사이에서 태어나 자라는 자녀들도 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이치는 너무나도 분명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택한 독신 역시 하느님께 향한 신앙의 힘으로만 온전히 지켜질 수 있고, 현실적으로는 함께 독신을 서원한 공동체의 형제들에 대한 사랑의 힘이 살아있을 때 독신의 어려움도 잘 극복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잘 지키기 위해서는 은총과 의지가 함께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은총 없이 의지만으로 실천될 수도 없고 의지 없이 은총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가정이건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이건, 하느님의 은총과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의지가 발휘될 때 성가정을 이룬 평신도들과 하느님 나라를 위한 독신을 충실히 살아가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진실된 성과 사랑의 가치를 보여주는 예표로서 그 역할을 다 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역사적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에제키엘이 고발하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동안에도 그들 자신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느님께 기도바치고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자가 보는 신앙과 우상숭배의 차이는 형식이 아니라 실제 내용에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자가 불륜이라고 일깨워주는 우상숭배적 풍조에 빠지지 않고 올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그분의 정배로 살아가기 위해서도 미사를 비롯한 성사생활과 기도생활의 형식만이 아니라 그에 담긴 지향과 마음 같은 내용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주제와 지향으로 예언 활동을 벌였던 북이스라엘 왕국의 호세아 예언자도 이렇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호세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