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소명과 응답에 관하여

수성구 2022. 8. 11. 06:15

소명과 응답에 관하여

에제 12,1-12; 마태 18,21-19,1 /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2022.8.11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소명은 타락하여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반항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하루라도 빨리 동족이 회개하도록 그들이 알아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하느님의 표징으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모두에게도 역시 주어져 있는 소명입니다. 예언자 미카도 상기시켜 준 바와 같이(미카 6,8), 하느님의 뜻을 의식하여 조심스레 살아가는 신앙, 주어진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소중히 여기고 만일 그 신의를 저버린 일이 생겼다면 용서를 청하는 용기, 또한 사회적 관계에서도 도리와 분수를 지키고 예의를 존중하며 주어진 일과 특히 금전관계에서 신용을 지키는 것이 이 소명의 기본입니다. 이 신앙과 신의와 신용이 소중하게 지켜지는 공동체와 인간관계에서라면 하느님의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서도, 신의에서도 또한 신용에서도 처음에 바랐던 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일이 인생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일곱 번만 용서를 청하거나 화해를 해서는 턱없이 모자랄 정도로 숱한 기회에 우리가 하느님께 신앙으로 죄를 저지르고, 인간관계에서 신의에 금을 가게 한다든지, 사회적 신용에 있어서도 소홀하거나 도리와 분수를 저버리는 궐함의 죄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도 넘게 저질러집니다. 우리 자신이 미처 모르고 지나가는 수가 숱하게 많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그렇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요, 한 탈렌트가 6천 데나리온이므로, 만 탈렌트라면 6천만 데나리온, 즉 일 년에 3백 일을 일한다고 쳐도 무려 2십만 년 동안 일해야 겨우 벌 수 있는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또는 우리네 인간관계에서나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모르는 사이에 저질러왔고 지금도 저지르고 있는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부채가 그토록 크다고 예수님께서는 일깨워 주신 겁니다. 

 

  예수님께서 관찰하고 계신 인간의 현실에서는 만 탈렌트나 되는 거액을 탕감받은 사람이 겨우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료에게 인색하게 구는 바람에 다시 끌려 들어가 원래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갇혀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셈법을 역산해 보면, 우리가 백 데나리온 어치의 자비를 이웃에게나 사회에서 불특정 다수에게 행하기만 하면, 하느님께로부터는 물론 이웃과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부터 만 탈렌트의 부채를 탕감받을 수 있다는 뜻밖의 지혜를 얻습니다. 다만 무엇보다도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진심으로 형제들과 이웃들에게 대하고, 역시 진심으로 사회적 활동에서 수행하는 임무와 책임을 다하면 우리가 들인 정성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자비와 보상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소명에 대한 응답의 지혜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적 생활에 감명을 받은 그는 복음의 가치를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수도회를 세웠습니다. 서로가 성소를 받기 전에는 거꾸로 클라라가 보여준 생활의 표양을 보고 프란치스코가 회개하였으니, 이 두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있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은 사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청빈과 겸손으로 복음을 살았기에 그 역시 같은 덕목으로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덕목을 통하여 스러져 가던 유럽 가톨릭교회를 영적으로 일으킨 프란치스코가 얻은 영예를 클라라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영예는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그 까닭은 아직도 이 세상과 우리 교회에는 이 덕목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가 발견한 청빈과 겸손의 덕목이 지닌 가치는 말씀의 두루마리에 적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백미에 해당하는 것이요 고갱이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에제키엘은 예언자로서 그 말씀을 단지 전했을 뿐이지만, 프란치스코와 클라라는 살고자 진력했습니다. 혼자서만이 아니라 수도회를 결성하여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살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 향기가 지금껏 풍겨옵니다. 청빈의 덕목은 물자를 아껴서 나누고자 하는 데 가치가 있습니다. 단지 없이 사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나눌 몫을 마련하기 위해서 내게도 필요한 것을 아끼자는 것이요, 물자를 아끼자니 몸을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는 근면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근검절약과 나눔은 청빈의 덕목에 따라다니는 부수적 덕목입니다. 겸손의 덕목은 인간관계에서 진가를 발휘합니다. 이는 강한 자 앞에서 굴종하거나 약한 자 앞에서 교만하게 구는 것과 다릅니다. 그런 태도는 비굴함이요 비열함일 터입니다. 겸손은 있는 그대로 대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빈과 겸손의 삶으로 클라라 성녀가 보여준 응답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고 있던 동시대인들에게나 후대의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그리고 만 탈렌트나 되는 어마어마한 자비를 우리가 이미 하느님께로부터 무상으로 받고 있다는 잉여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이 응답을 재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