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수성구 2022. 8. 10. 06:38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코린 9,6-10; 요한 12,24-26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022.8.10.

 

  사람은 하느님의 손으로 창조되었고 그래서 하느님을 닮아야 본인도 행복할 수 있고 세상도 구원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보다 악령에 기울어지기 쉬운 인간 자유 탓으로 사람은 종종 이러한 이치를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서 착하게 산다는 것도 실제로는 자기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기준이 자기자신의 양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이끌리지 못하고 신앙으로 자극받지 못하며 신앙으로 성장하지 못한 양심,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요 역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이라고 당신 자신을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살게 되면 그가 받은 은총이나 이룩한 업적은 그가 죽을 때 모조리 땅에 묻힙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그 은총과 업적이 많은 씨앗으로 퍼집니다. 사랑에는 영원한 힘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씨앗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 밭에 떨어지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은 조급한 마음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짊어지면서도 부활에 대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고, 세대를 거쳐 하느님께서 반드시 당신의 뜻을 관철하고야 마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코린토에 복음을 전할 때에도 지혜롭거나 유력하거나 좋은 가문 출신인 엘리트들보다는 별로 내세울 것도 없고 비천한 대접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된 약자들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서 공동체를 세웠습니다(1코린 1,26-28). 물론, 그렇게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는 일이 그에게는 십자가였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배우고 맛들이게 되는 동안에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몹시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세속에서 배운 죄스런 습관을 쉽게 버리지 못했고, 자신들끼리 다투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도들을 따라 분열하는 행태까지 보였습니다. 이 모두가 사도 바오로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십자가였습니다만, 그는 이 십자가를 힘든 멍에로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박해까지 했던 자신의 죄를 보속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으며, 예수님을 닮기 위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야말로 하느님의 힘이요 하느님의 지혜라고 믿었고(2코린 1,24), 이 진리의 깨달음으로 코린토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를 알아들은 코린토 신자들에게는 큰 기근이 들어 어려움을 겪게 된 예루살렘 공동체를 돕자고도 제안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도움만 받으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고, 가난해도 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그들의 구원도 완전해지는 법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받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라도 어려워진 이들을 기꺼이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듯 가난의 현실을 기준으로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면서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게 되어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도움이 절실한 가난한 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면 착한 사람들도 하느님을 만나기 어려운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오로의 실천은 역사의 밀알이 되어 땅에 묻혔고, 수많은 씨앗이 되어 사방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스페인 출신으로 로마교회 초기 부제였던 라우렌시오의 마음밭에도 떨어졌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세상 사람들에게나 믿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할 계기를 마련해 주는 존재들이어서 교회의 보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도움을 받은 가난한 이들이 모두 다 거룩하게 변화되지는 않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도움을 베푼 그 마음과 정성은 남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도 코린토 신자들에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하고 일깨워주었던 바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이 상황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리하여 도움을 받아 빈곤에서 벗어나게 된 가난한 이들이 드디어 세상의 죄악에 물들었던 때를 벗고 순수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믿게 되면, 그야말로 무수하게 많은 씨앗을 퍼뜨리는 밀알이 될 수 있도록 당신의 도구로 쓰십니다. 집 짓는 자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법입니다. 저 도도한 2천 년 역사 동안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이 머릿돌들에 의해 지어진 하느님의 집을 세상 곳곳에다 차곡차곡 지어 왔습니다. 

 

  우리가 밀알이 되어 한 알로 남든 땅에 떨어져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든, 우리의 선택에 따라 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적게 뿌리는 이가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가 많이 거두어들이는 이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생각과 말과 행위 하나하나가 그 밀알이 될 것입니다. 또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성취한 모든 은총도 순전히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거둔 것이라기보다는 먼저 살았던 이들이 뿌린 씨앗이 맺은 열매들입니다. 그러니 길게 보고 선택할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