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수성구 2022. 8. 9. 02:46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필리 3,8-16; 요한 21,15-17 / 서원 갱신 미사; 2022.8.9.(화); 이기우 신부

 

  오늘 우리는 수도 서원을 갱신하려는 수녀님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향으로 오늘 미사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교회 2천 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손꼽히는 인물입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그 당시 로마제국의 넓은 강역을 다니면서 공동체들을 건설하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편지들을 보냈고, 이 편지들이 각 공동체의 전례에서 봉독되면서 오늘날 미사 중 말씀 전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가 보낸 편지들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들은 필리피 공동체에 보낸 편지는 압권입니다. 왜냐하면 필리피 공동체는 그가 세운 공동체들 가운데에서도 선교적 동지로 여길 만큼 성숙한 공동체였기 때문에, 필리피 편지 안에는 그가 지닌 사도적 확신과 선교적 긍지가 물씬 녹아있어서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8-11). 그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행해지던 그리스식 교육을 받아서 수사학과, 기하학, 논리학 등에 통달했던 엘리트였고 로마식의 체육 단련도 받은 덕분에 그 넓은 지역을 걸어서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체력도 튼튼했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최고의 율법 교사로 명성이 자자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유다인의 율법 전통도 배워서 벤야민 지파 출신이라는 혈통적 긍지와 더불어 선민적 정통성에서도 남달랐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만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오는 부활의 힘만을 배우고자 했고 이에 비추면 그가 습득한 모든 학식과 정신적 자부심은 쓰레기로 여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모든 것들은 인간적이고 현세적인 차원에서만 쓸모가 있을 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이끌어주시는 부활의 힘은 인생을 천상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려줄 뿐 아니라 내세에서 누릴 영원한 생명까지도 이끌어주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말합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 우리가 어디에 이르렀든 같은 길로 나아갑시다”(필리 3,12.16). 부활의 힘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이기 때문에, 사도 바오로 역시 바라고는 있지만 차지했다고 확신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필리피 교우들에게 동지로서 권고할 따름입니다. 그가 겸손하게 권하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또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손수 뽑으신 열두 제자 가운데에서 수제자로 고르신 인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장점과 단점을 다 알고 계셨고, 또 겪으셨습니다.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을 때에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기도 하셨고, 십자가 수난을 만류하러 들었을 때에는 “사탄아, 물러가라!”시며 호통을 치기도 하셨습니다. 심지어 그가 당신을 부인하는 배반을 저지르리라는 것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에 앞서 이렇게 단도리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채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수제자를 위한 이 눈물겨운 기도의 연장선 상에서 오늘 복음이 전해주는 감동적인 대화와 고백이 가능했습니다. 

 

  이것은 수제자에 대한 스승의 심판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죄하기 위한 심판이 아니라 용서해 주기 위한 심판이었고, 죄책감을 씻어주고 신임을 부여하기 위한 영예스런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의 부인을 염두에 두신 듯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지셨는데, 그 질문 내용은 질책이 아니라 체면을 살려주시는 대화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이를 눈치챈 베드로도 굳이 변명하지 않고 스승의 마음에 기대어 대답하였습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 이렇게 베드로가 예수님께로부터 당신의 양 떼를 돌보라는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께로부터 나오는 부활의 힘을 정확하게 목표로 하여 사도로서나 선교사로서 노력했으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인격적인 신뢰의 힘을 받아서 사목자로서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두 인물 다,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이 힘과 자격을 얻어 누렸음을 우리가 상기해야 합니다.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고 부여받는 사도직 역시 부활의 힘을 얻어 누리기 위한 십자가의 기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전이 불가피하고 어려움도 뒤따르기 마련이며 시행착오도 각오해야 합니다. 또한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느 정도의 선교적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해도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활의 힘으로 사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