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말씀에 의한, 십자가와 부활의 균형

수성구 2022. 8. 8. 06:51

말씀에 의한, 십자가와 부활의 균형

 

에제 1,2-28; 마태 17,22-27 /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2022.8.8.; 이기우 신부

 

  군중이 물러가고 제자들만 남은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다시 예고하셨습니다. 이렇게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 예고를 반복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처음으로 당신을 알아보고 신앙 고백을 했지만 수난의 섭리를 알지 못한 채 세속적인 영광만을 기대하며 고백한 듯 보였기에,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도 못미더우셨던지 작정하신 듯이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고 이것도 모자라서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거룩한 변모의 기적으로 부활의 영광에 대한 확신도 심어주셨습니다만, 제자들은 여전히 마귀를 쫓아내지 못할 정도로 믿음이 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머지않아 닥칠 수난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서 두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장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조차 없어 보여서 알아듣지 못할지라도 언젠가는 알아들으리라고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제자들이 “몹시 슬퍼하였습니다”(마태 17,23).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데에도 닥친 십자가에 놀라기도 하고, 심지어 하느님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데도 종종 뜻하지 않게 십자가가 다가오면 그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그 안에 숨겨진 부활의 은총에는 둔감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부닥치게 되는 십자가에만 신경을 쓰면 슬퍼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로 인한 부활의 은총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그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전해주는 예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 처방을 도와주는 보조 처방입니다. 그의 예언 활동은 동족이 우상숭배로 심판받는 바빌론 유배의 상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바빌론 유배가 시작된 후에는 그곳으로 백성들과 함께 끌려가서 포로가 된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유배가 풀리고 난 다음의 미래를 예언하는 한편 지금부터라도 하느님께 희망을 두고 고통스런 그 유배생활을 견디도록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독서는 사방으로 뻗은 말씀의 광채와 천지를 뒤흔드는 천둥 소리 등 하느님 말씀이 지니신 영광스런 위력에 대해 매우 묵시적인 언어 표현으로 묘사하는 대목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선을 실천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서는 말씀에서 오는 힘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속적인 환경에서 오는 유혹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를 둘러싼 영적인 현실을 정확하게 보게 해 줍니다. 세속적인 지식으로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만 분석할 수 있을 뿐입니다. 말씀에 의해 강화되는 영적인 분별력이 우리의 이성을 건전하게 이끌 수 있고, 말씀으로 이끌리는 영적인 감각이 우리의 감수성을 분명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이 말씀에 충실해야 하는 노력은 마치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납부해야 했던 성전세와도 비슷합니다. 

 

  성전세의 근거는 탈출기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인구 조사를 받는 스무 살 이상의 남자는 누구나 속죄를 위한 예물로 반 세켈을 성전에 바쳐야 하는 의무가 있었습니다(탈출 30,12-16). 그런데 이 속전은 은으로 된 화폐 단위였던 세켈이 스타테르로 바뀌면서, 반 세켈 대신에 한 스타테르를 바치도록 규정도 바뀌었습니다. 이는 당시 노동자의 나흘치 임금에 해당됩니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바치는 노력은 영적인 성전세와도 같습니다. 성전세로 충당되는 재원이 십일조와 함께 유다교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처럼 교회의 영적 기반은 말씀에 대한 신자들의 노력과 이 말씀을 실천하고자 십일조처럼 바치는 시간과 재능의 희생으로 이룩됩니다. 

 

  말씀을 알아 듣기 위해 바쳐야 할 노력의 첫 번째 초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신 바를 알아듣고 과연 그분의 십자가가 어떠했는지를 깨닫는 한편 그분의 부활로 인한 영광이 당시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초점은 사도들과 초대교회 신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고자 애썼으며 또 어떻게 부활하신 그분의 이끄심을 체험하고 변화되었는지를 깨닫는 데 있습니다. 매일 미사의 말씀과 강론이 이를 위해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에 더해서,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바쳐야 할 영적인 십일조는 신앙인들이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발휘해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고 이에 응답함으로써 주어진 현실을 복음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바쳐야 합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은 많은데 그 중 십분의 일만을 바치라는 데에도 인색하면 그 은총은 조만간 사라질 것입니다. 이러한 봉헌의 노력으로 신앙인들은 시대를 구원하는 데 동참할 수 있는 것이고 자신의 구원은 덤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십자가는 부활과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 부활할 수도 없지만, 부활의 은총으로부터 오는 희망과 힘이 아니면 십자가를 짊어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