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묵상글 나눔 3032

평화를 구하는 용기

평화를 구하는 용기 평화를 구하는 용기 마태오 복음 10장 7-15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 ​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이웃과 어떤 ‘평화의 인사’를 나눌까요? ‘평화의 인사’는 성경에서 풍요로움, 번영, 평안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샬롬(shalòm)’으로 표현됩니다. ‘샬롬’은 인간의 번영과 평안한 삶을 기원하지만, 그것은 현대 심리학이나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내적 평온’ 그 이상의 것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4월15일 일반 알현 강론 참조). 즉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결과적인 ‘상태’로서의 평정과 평온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추구할 수..

이름에 담긴 비밀

이름에 담긴 비밀 이름에 담긴 비밀 마태오 복음 10장 1-7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 오늘 복음이 전하는 열두 사도의 이름에서 특별한 점은 다른 복음서들과는 달리 둘씩 짝지어져 있다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에 주목해봅니다. 다른 복음서에 의하면, 마태오의 이름이 토마스 앞에 위치합니다(마르 3,18; 루카 6,15 참조). 마르코나 루카 복음이 서열상 마태오의 이름을 먼저 위치시키는 것은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따라나선 마태오의 믿음을 예수님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는 토마스의 불신보다 더 높이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마태오 이름 앞에 굳이 ‘세리’라는 과거의 직업을 넣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당시 손가락질받던 세..

용기 있는 믿음

용기 있는 믿음 용기 있는 믿음 마태오 복음 9장 18-26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 오늘 복음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사화가 주를 이루는데, 중간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한 여인에게 가시는 길에 또 다른 여인을 치유하십니다. 왜 갑자기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낫는 여인의 이야기가 첨가된 것일까요? 회당장과 하혈하는 여인에게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대면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엎드려 절하며” 말하였고, 당시 지속적인 하혈은 율법에서 부정한 것으로 여겼기에(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예수님 뒤로 슬그머니 다가가’ ..

은총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 은총의 십자가 마태오 복음 11장 25-30 약간의 긴장상태가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작용-반작용의 법칙처럼, 적당히 무거운 짐은 그것을 멘 이들로 하여금 잘 지탱하도록 지지해주기 때문에 ‘짐’은 ‘힘’을 발생시킵니다. 가족이 짐이 되지 않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오히려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짐’이냐 ‘힘’이냐의 문제는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체감하는 짐의 경중이 정말 우리 ‘마음먹기’에 달려 있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는 것은 자칫 모든 진리가 인식하는 주체의 주관적 견해에 의존하게 된다는 상대주의에 빠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이 느끼는 ‘짐’이 ‘힘’이 될 수 있는 이유..

어떤 단식

어떤 단식 어떤 단식 마태오 복음 9장 14-17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 오늘 복음에는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바리사이들이 등장합니다. 일종의 ‘시샘’입니다. 나는 이만큼 하는데 왜 저 사람은 나만큼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나는 이렇게 단식하고 있는데 저들은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이런 시샘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일까요? 먼저 바리사이들의 단식이 자발적이지 않았다는 것부터 살펴봅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과 규정에 얽매여 얼굴을 찌푸리며 마지못해 단식한 것입니다. 자발성이 결여된 행동은 해놓고도 만족스럽지 못하지요. 자기 결정과 자발적 선택이 아니기에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행동은 타인의 것과 비교하고 시샘을 자아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드러..

믿음을 증명하는가, 증거하는가?

믿음을 증명하는가, 증거하는가? 믿음을 증명하는가, 증거하는가? 요한 복음 20장 24-29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 예수님 손에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던 토마스도 결국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합니다. ‘보이는 것’만 믿겠다는 태도에서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믿겠다는 고백으로 변화된 것이지요. 즉 토마스의 변화는 경험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이행입니다. 철저한 실증주의가 어떻게 존재를 확신하는 형이상학이 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경험주의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오류는 인간이 ‘보이는 것만 체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체험’은 ‘보이는 것’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의 차원을 포함하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영혼의 중풍

영혼의 중풍 영혼의 중풍 마태오 9장 1-8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 오늘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낫게 해주십니다. 그런데 고쳐주시는 이유가 아픈 이 때문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환자의 상태보다 돌보는 이들의 간절함을 더 보신 것입니다. 중풍이란 혈관이 막히거나 터져서 혈액을 공급받던 뇌의 일부가 손상되는 ‘뇌졸중’으로, 반신마비나 언어장애 심하면 전신의 감각이 마비되기도 하지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는 ‘평상에 뉘어 데려온 것’으로 보아 상태가 많이 나빴던 것 같습니다.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본인은 이미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실낱같은 기대나 희망도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결국 주변 사람..

이 시대의 마귀

이 시대의 마귀 이 시대의 마귀 마태오 8장 28-34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 예수님은 무덤에서 마귀 들린 사람 둘과 마주칩니다. 그들은 ‘쇠사슬로도 묶어 둘 수가 없을’(마르 5,3) 만큼 ‘너무나 사나웠습니다.’(마태 8,28) 마치 좀비 영화를 연상케 합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은 ‘마귀 들린 사람’을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기 위해 게걸대는 좀비 아니, ‘돼지 떼’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마귀’는 정말 좀비처럼 추악하고 혐오스런 모습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의 마귀는 돼지 떼처럼 지저분하지도, 좀비처럼 섬뜩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교묘하고 그럴싸한 모습으로 존재하지요. 심지어 오늘 복음에서처럼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너무나 태연하게 질문합니다. “당신께서 저..

살아 계신 분

살아 계신 분 살아 계신 분 마태오 16장 13-19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주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십니다. 베드로가 칭찬받은 것은 주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며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살아 계신 분과 함께 있는 이들이 행하는 첫 번째 실천은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의 부활 이야기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여인들이 향료를 준비해서 주님의 무덤에 갑니다. 거기서 ..

참된 사랑의 길

참된 사랑의 길 참된 사랑의 길 마태오 10장 37-42 우리는 평소에 부모님께 잘하지 못하면서도 오늘 말씀은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우리더러 부모와 자식을 버리고 신앙생활만 하는 광신도가 되라는 말씀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교회는 오랫동안 수도생활이라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를 떠나, 가진 것을 버리고 광야로 떠났습니다. 그들이 광야로 간 것은 세상의 복잡한 일을 피하고 혼자만의 마음의 평안을 얻으러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수도자는 악마를 피하려고 광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악마를 만나기 위해 광야로 간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옛 수도자들이 광야로 간 것은 주님을 더 가까이 만나고 참된 나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을 들어왔습니다. ‘부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