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성찬례가 부활의 성사임을 일깨워준 소생 기적

수성구 2022. 9. 12. 03:56

성찬례가 부활의 성사임을 일깨워준 소생 기적

 

1코린 11,17-33; 루카 7,1-10 /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2022.9.12.; 이기우 신부

 

  미사에서 거행되는 성찬례는 예수님께서 신자들을 부활 신앙에 초대하는 성사입니다. 그리고 이를 일깨워주시고자 일으키신 사건이 소생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인 백인대장의 종을 살려주심으로써 신적인 권능을 드러내셨고. 이는 제자들과 이를 지켜보던 군중으로 하여금 부활 신앙을 일깨우기 위한 성사적 기적 사건이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초대교회에서 전해 받은 성체성사의 전승을 코린토 교우들에게 전해주면서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임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따라서 부활에 참여하려는 신자들은 그분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해야 함을 힘주어 강조하였습니다. 

 

  공생활 동안 예수님께서 죽은 사람을 살려 주신 적은 여러 번이었고(회당장 야이로의 딸, 마르 5,41-42; 왕실 관리의 아들, 요한 4,49-51; 라자로, 요한 11,43). 구약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는 이런 소생 기적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과 사람들의 믿음을 불러일으키고자 일으키셨습니다. 그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일입니다. 특히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시어 살리실 때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요한 11,25-26)을 미리 밝히신 바가 있습니다. 

 

  로마인 백인대장의 종을 살려주신 소생 기적 사건의 의미 역시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가 밝혀집니다. 더욱이 이 사건은 이스라엘을 강제로 무력 통치하던 로마군인이 청해 온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원수 사랑’(마태 5,44)의 실제를 보여준 일이기도 합니다. 이 일에서 예수님의 각별한 마음가짐도 돋보이지만, 그 백인대장의 돈독한 믿음도 칭찬을 받을 만 하였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었지만 유다인의 원로들이 호감을 가질 만큼 유다인들에게 선정을 베푼 사람이었고, 또 그가 군인 정신에 투철하기도 했거니와 유다인이신 예수님께서 이방인인 자신의 집에 들어가는 행위는 유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점까지도 감안해서,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자기 종이 당장 살아날 것”이라는 보기 드문 믿음을 드러내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6-7). 그만큼 그 종이 백인대장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루카 7,2)이기도 하려니와,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인 백인대장이 역시 유다인인 당신에 대한 예의도 깍듯한데다가 로마 제국의 질서에 충직한 군인정신에 따른 믿음까지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시고 “이스라엘에서 본 적이 없는”(루카 7,9) 그의 믿음을 크게 감탄하시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권능을 찬미하는 영성체 기도에 교회는 그의 신앙 고백을 도입하였습니다 :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그 취지는 우리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 일상적으로 죽을 병에 걸릴 위험에 처해있어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한 6,35)이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심으로써 죽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 이전에라도 그 생기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영혼이 쇠약해지면 육신의 면역력이 약해져서 생기가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영성생활의 기본 상식입니다. 

 

  과연 성찬례에서는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이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를 되풀이하면서 신앙의 신비를 고백하게 합니다. 이 대목에서 사제는 “신앙의 신비여!”라는 환호로 외치고, 신자들은 내용상 감격스런 고백으로 환호에 응답합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이는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희생으로 말미암아 부활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신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행하는 애덕은 그분의 죽음에 동참하는 의미로 행하는 희생이므로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는 사다리입니다. 이 희생이야말로 성찬례가 행해지는 미사에 합당한 예물이요 미사라는 잔치에 합당한 예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생략한 채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찬례나 기계적으로 참여하는 영성체를 경계해야 합니다.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시려던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해야 하고,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라.”고 생애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절절하게 당부하신 심정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전하시려고 당신 목숨과 맞바꾸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진리에 순종함으로써 우리가 죄를 씻고 세상의 죄까지도 없애게 될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는, 언뜻 보아서는 대단히 어려운 행동들도 이 진리에 대한 순종으로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신앙의 놀라운 신비요, 고마운 은총입니다. 요컨대, 성찬례가 행해지는 미사는 부활의 성사이며 일상적으로 죽을 위험에 처한 우리 영혼을 살려주는 소생 기적 사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