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24주일] 되찾은 기쁨에 대하여

수성구 2022. 9. 11. 02:48

[연중 제24주일] 되찾은 기쁨에 대하여

되찾은 기쁨에 대하여

탈출 32,7-14; 1티모 1,12-17; 루카 15,1-32

연중 제24주일; 2022.9.11.; 이기우 신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불러내신 아브라함의 후손인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며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모세를 시켜 어렵사리 해방을 시키시고는 당신 백성을 삼으셨는데, 그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도 빨리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우상숭배로 돌아서고 말았습니다(제1독서). 그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거짓 목자들이 다수 출현하는 바람에 백성 전체가 길 잃은 양떼가 되어 버렸고, 특히 그 중에서도 힘 없는 백성은 가난하고 병들고 마귀들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으로 자처하던 자들에게는 거리를 두시고, 죄인으로 단죄받았거나 회개하려는 백성을 주로 만나셨습니다. 이것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에 담긴 사연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참으로 기뻐하며 맞아주셨는데, 이것이 ‘은전을 되찾은 부인의 비유’에 담긴 사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두 가지 비유에 더해서 ‘돌아온 아들의 비유’도 말씀하셨는데, 이 이야기 속에는 당신이 느끼는 되찾은 기쁨이 바로 하느님의 자비임을 일깨워주시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거짓 목자들에게 무시당하며 핍박당하던 이들은 비록 죄인 취급을 당하여 작은 아들처럼 버림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동구 밖에서 서성이며 집 나간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이야기입니다(복음). 

 

  예수님께서는 기다리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길 잃은 양 떼’를 찾아다니시며 곳곳에 사는 ‘작은 아들들’을 만나러 여러 고을을 순회하셨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돌아온 작은 아들들을 만나셨고 그들과 기쁨의 잔치를 벌이셨지만, 그때마다 ‘큰 아들’에 비유되는 바리사이들 같이 자칭 의인들은 이를 질투하며 트집 잡기 일쑤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연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은 자기 자신도 그러한 ‘큰 아들’에 속한 바리사이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모독하고 박해하고 학대하던 과거를 뉘우치고 예수님처럼 작은 아들들을 찾아 나섰던 참이었습니다. ‘첫째가는 죄인’(1티모 1,15)임을 잘 알던 그는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체험시켜 주러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체험을 자신의 믿음으로 밝혀주며 깨달음이 생겨서 믿게 된 이들로 공동체들을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티모테오는 두 번째 선교여행 중 리스트라에서 얻은 제자였습니다. 이제 믿음이 성장했고 경험도 쌓은 그를 사도로 삼으며 사도 바오로는 사명감을 심어 주고 자신의 경륜도 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건설한 공동체 중 가장 큰 에페소 공동체를 맡겨 주었습니다(제2독서). 

 

  사실 사도 바오로의 생애야말로 예수님께서 되찾고자 하시던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그만큼 극적이고 파란만장했으며 또 풍성한 선교 성과를 거두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선교 활동은 저 로마제국이 가하던 박해를 극복하고 신앙의 공인을 얻어냈으며 급기야 국교로까지 인정받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비록 이스라엘 땅이 아닌 디아스포라에서 살았지만, 부모는 유복한 중산층이었고 그 도시는 로마제국이 점령한 소아시아의 국제도시 타르수스였습니다. 그래서는 그는 어려서부터 로마식의 국제 교육을 받았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기본이고 수사학과 논리학과 기하학을 오전에 공부하면 오후에는 누구라도 로마 군인이 될 수 있도록 강인한 체력을 단련하는 체육 과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부터는 이스라엘로 유학을 와서 당시 최고의 율법 학자로 알려진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율법과 성경까지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지닌 율법적 열성은 동창생인 스테파노가 교회의 부제가 되어 복음을 선포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현장에서도 그의 처형에 찬동할 만큼 대단했었습니다(사도 8,1). 그뿐만 아니라 스테파노처럼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신자들을 잡으러 대사제의 체포영장까지 발부받아 마치 수사관처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그는 벼락을 맞았고 번개 빛에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습니다. 

 

  이 바람에 혼비백산하여 흩어진 사람들 틈에서 그만 홀로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이 소리를 듣고 놀란 사울이 하늘을 향해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자 하늘에서 다시 응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1-18). 이후 사울은 더 이상 박해자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회심한 그가 사도요 선교사로서 새 인생을 출발하기까지 14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간단치 않은 과정이 걸렸습니다(갈라 2,1). 이 기간 동안 그는 아라비아 사막이나 타르수스 고향집에서 잠심하면서 성경 기록을 샅샅이 훓어보기도 하고 예수님을 만났던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전해 듣기도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다.” 하는 확신을 얻고는 완전히 거듭 났습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이 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선교사로서 소아시아와 그리스 일대에서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오늘날 서방교회의 지리적 터전을 마련했으며 동방교회까지도 아우르는 그리스도교의 정신적 기반을 구축해 놓았습니다.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교회야말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다”(에페 1,23)고 내다보았습니다.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이게 될”(에페 1,10) 미래가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러한 깨달음으로 배운 그 제자들이 히브리인들에게 써 보낸 편지에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교회론의 근거가 이렇게 나와 있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히브 1,1-2).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도 바오로가 내다본 바대로 지나온 교회 역사 2천 년을 회고하며 성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부들과 일치하여 1990년에 향후 교회의 미래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입니다. 교황은 전 세계의 신자들에게 당부하기를, “교회에 위임된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명’(Redemptoris Missio)은 아직 완수되지 아니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강생 제2천년기를 마감하며 인류에 대한 총체적인 전망에서 보면, 이 사명은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물러 있고, 따라서 우리는 이 사명 수행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1항). 

 

  세계의 선교 상황이 아직 출발선상에 머물러 있다고 지난 2천 년의 교회역사를 평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이 지적은 정확히 아시아 교회에 해당됩니다. 아시아 교회는 선교가 시작된 지 2천 년이 경과한 지금도 여전히 주변부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시아 대륙이야말로 되찾아야 할 복음화의 땅인 것입니다. 전 세계 가톨릭교회 안에서 아시아 교회가 주변부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은 고작 3%대의 신자 비율 때문만은 아닙니다. 모든 형태의 빈곤과 소외로부터의 자유를 열망하는 추세가 뚜렷한 이 21세기에 들어서서도 빈곤과 소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가난한 이들이 아시아 대륙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3%에 미달하는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아시아인 대다수가 신봉하는 전통 종교인들도 이 빈곤과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구에서 시작된 세계화 과정이 아시아인들의 생활양식을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지만, 소수 엘리트들을 중산층으로 만들어주었을 뿐 소득양극화 정책으로 인하여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날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두 차례나 한국을 방문하여 순교자들을 시성하였고 성체대회를 주관함으로써 한국교회와 신자들을 격려하여 준 바 있는데, 이럴 때마다 한결같이 주는 메시지는 한국교회가 받고 있는 은총을 아시아에 나누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열렸던 세계성체대회에서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우리 민족이 그토록 염원하는 한반도 평화와 민족 복음화는 한국교회가 하느님께서 되찾기를 원하시는 아시아인들의 복음화를 위해 나설 때 선물로 주어질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였습니다. 서구와 달리 한국은 아시아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빈곤과 소외를 극복한 경험도 가지고 있는데다가,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아시아 교회를 도울 수 있는 역량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선교 3세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교회가 사도 바오로가 그러했듯이, 아시아에서 당신 백성을 모아오기를 하느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전한 보편교회의 여망 속에는 하느님의 뜻은 물론 한국교회를 바라보는 서구와 아시아를 망라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흐름을 잘 읽고 있던 프란치스코 교황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다방면에 걸쳐서 교회를 쇄신할 것을 요청하는 주문을 하고 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2천 년 전 로마와 서방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돌려 세워 사도와 선교사로 부르셨듯이, 한국교회의 복음적 교회 쇄신을 통한 아시아 복음화의 길을 걸어갈 또 다른 바오로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내다본 교회의 미래를 열어서 하느님께서 기다리시는 길 잃은 양 떼를 되찾아 올 새로운 일꾼들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우선 아시아인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온 세계 인류에게 비출 진리와 사랑의 빛이 될 것이고, 세계 선교역사상 처음으로 복음적인 선교의 한류가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문명을 세우려는 우리를 도구로 삼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