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나의 이야기

하느님은 사랑이다 vs 레지오를 마치고 논다.

수성구 2022. 8. 10. 15:48

하느님은 사랑이다 vs 레지오를 마치고 논다.

God is love vs. Reggio and play.

오늘은 하루 종일 가랑비가 오다 말다를 한다.

Today, the drizzle comes all day long.

서울에는 홍수가 나서 무슨 난리를

치른거 같아서 서울 사람들은 도로도 유실되고

무너지고 한다고 한다.

아마도 100년 만인가 하더니 나중에는 117년만이라 한다.

It is probably 100 years, and later it is only 117 years.

우리 기억으로도 서울이 잠긴 것은 아마도 처음 이지 않나 싶다.

It is probably the first time that Seoul has been locked in our memory.

모두들 서울이 좋다고 올라가고 거기서 터를 잡으면 

부자 소리듣는다 한다는데 그러한 서울이 한순간에 

휩쓸려가는 것을 보면서 사람 사는거 우리는 장담 할 수 없는 

세월이 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 이곳 대구는 지금 가랑비가 촉촉히 적셔 주곤 

한다는데 아직은 그렇게 비님이 쏟아 지지를 않는다.

So, we are here in Daegu, where the drizzle is moistened and wet, but the rain is not so much.

그래서 어제 오늘 테레비에서는 내내 뉴우스 시간에도 

서울의 홍수를 보도를 해주고는 한데 아마도 뉴우스 중에 

뉴우스꺼리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렇게 가랑비를 맞으면서 우리는 성당에를 간다.

아침 미사 마치고 까페에 앉았다가 집에를 오면서 참 내가 들어간 

레지오는 모두 그렇게 농뗑이들인가 본다.

After the morning mass, I sat in the cafe and came home,

and I think that all the regios I entered are so farmers.

아침 미사 마치고 집에 오니 마음이 편해 진다.

알비나는 맛사지를하러 온다던 사람이 자기들 레지오 마치고 

가창 가서 밥먹고는 오지 않고 논다고 한다.

Albina says that the person who comes to massage is going to go to the

house after their regio and eat and drink without coming.

그래서 "언제 오냐" 라고 하면 "몰라" 그런다.

이미  놀던 기분이 고조되어 있는  상태라서 더 이상 묻지도 않는다.

할망구 들이 모이면 밥먹고 차마시고 야단들이다.

그래서 하염 없이 기다리다가 난 글을 올려 본다.

So I wait without a moment and I upload it.

오늘의 복음에서 보면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다 

성경모순 주장 변증) 하느님은 사랑이다=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이다"(요한1서 4:8)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린도전서 13:4)
="너희들의 주인인 나는 시기하는 하느님이다."(출애굽기 20:5)

 

(고린도전서 13:4)

Ἡ ἀγάπη μακροθυμεῖ, χρηστεύεται ἡ ἀγάπη, οὐ ζηλοῖ, ἡ ἀγάπη οὐ περπερεύεται, οὐ φυσιοῦται,

ζηλοῖ=envious

 

(출애굽기 20:5)

לֹֽא־ תִשְׁתַּחְוֶ֥֣ה לָהֶ֖ם֮ וְלֹ֣א תָעָבְדֵ֑ם֒ כִּ֣י אָֽנֹכִ֞י יְהוָ֤ה אֱלֹהֶ֙יךָ֙ אֵ֣ל קַנָּ֔א פֹּ֠קֵד עֲוֹ֨ן אָבֹ֧ת עַל־ בָּנִ֛ים עַל־ שִׁלֵּשִׁ֥ים וְעַל־ רִבֵּעִ֖ים לְשֹׂנְאָֽ֑י׃

קַנָּ֔א=jealous

 

신약이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구약이 히브리어로 쓰여졌는데

고린도전서 13:4 에 나온 시기 ζηλοῖ,와 출애굽기 20장 시가 קַנָּ֔א는 서로 다른 뜻임

ζηλοῖ은 envious에 가깝고 קַנָּ֔א jealous에 가깝움

서로 유사하지만 다른 뜻을 담고 있음.

서로 다른 말인데 막상 한글로 번역해서 보니 둘다 "시기"이니 오해하는거임.

출애굽과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시기"는 서로 유사하지만 다른 뜻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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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오류가 없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다. 죄를 짓고 사는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죽으셔야 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셨던 예수님을 경비병과 군인들이 잡아갔다. 은전 30냥에 이스카리옷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배반하였다. 그렇게도 굳게 믿고 사랑하던 베드로까지도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했다.

예수님은 경비병들에게 뺨을 맞고 모욕을 당하면서 가시관을 쓰신 채 피를 흘리며 고통당하시고, 사람들에게 조롱당하셨다. 결국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하시다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고 말씀하시면서 숨을 거두셨다. 한 인간이 죽음의 길로 가는 마지막 순간의 상황이었다.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고, 무슨 행동을 하셨기에 그렇게도 박해당하고 죽음으로 처절하게 인생을 마치실 수밖에 없었는가?

그분은 공생활을 하실 때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고 사랑의 계명을 외치신 분이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 소외받는 사람들, 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을 만나 낫게 해 주시고, 연민의 정으로 받아주신 분이다. 창녀와 세리와 같은 죄인들조차 자비를 베풀어 용서해 주신 분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상에서 개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예수님의 죽음은 바로 우리 인가의 죄 때문이다. 인간의 죄 혹은 악의 세력은 사랑하기를 거부한다. 용서하지 못한다. 가난한 자, 고통받는 이웃을 싫어하고 그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의인, 착한 사람을 모함하기도 하고, 여럿이 모여 모의하여 위해를 가하는 등 가만히 두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거부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신부님의 체험담이 기억난다. 그 신부님은 이 체험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어느 날 서울에서 춘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같은 좌석에 어린 꼬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이 대화를 나누는 걸 옆에서 얼핏 들었다. 아마 꼬마는 이 여학생의 조카쯤 되었나 보다. 대뜸 이 어린이가 고등학생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하느님은 언제 죽으셔?”

정말 어린이다운 천진한 질문이었다. 나라면 무어라고 대답했을까? 그 고등학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 죽으셔.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야.”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 신부님은 무언가에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고, 화해하지 못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외면할 때, 다시 말해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 예수님은 계속 죽으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어디든지 살아 계시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사랑의 하느님이 온전히 살아계신 가정, 이웃, 사회, 세상을 희망한다.

 

*<행복한 사람들> / 김민수 이냐시오 신부

중에서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Today, I am spending my day in the grace of the Lord and the Virgin.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Thank you, healthy, I love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