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6주일] 감추어져 있던 신비, 선포되는 말씀

수성구 2022. 7. 17. 02:54

[연중 제16주일] 감추어져 있던 신비, 선포되는 말씀

감추어져 있던 신비, 선포되는 말씀

창세 18,1-10; 콜로 1,24-28; 루카 10,38-42

연중 제16주일; 2022.7.17.; 이기우 신부

 

1. 오늘은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된 제헌절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백 살이 된 아브라함과 아흔 살이 된 사라에게 아들이 태어나리라고 전갈하셨습니다. 그가 일흔다섯 살에 고향을 떠나와(창세 12,4) 많은 후손을 얻으리라는 축복을 받은 지(창세 15,4; 17,4) 스물다섯 해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실현하시고자 그렇게 하셨습니다. 

 

2. 그로부터 천칠백여 년이 흐른 후, 아브라함의 또 다른 후손인 바오로가 그 하느님 백성의 역사를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에 있던 아주 작은 도시 콜로새에 신앙의 둥지를 튼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그는 고난을 겪고 있었으면서도, 그에 대해 해석하기를, 교회를 위한 고난이지만 이는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자신이 채우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라면 더구나 사도라면 고난을 겪으신 그리스도를 같은 고난으로써 본받아야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로써 로마제국의 박해와 함께 새로운 이단적 밀교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콜로새 교우들을 격려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한 고난을 기쁘게 겪는 것이야말로 감추어졌던 신비를 드러내는 말씀의 삶이라고 격려하였습니다. 우리네 삶에서 말씀이 지닌 가치가 드러날 때 하느님의 신비도 드러나게 됩니다. 

 

3. 말씀이 지닌 가치가 드러나는 방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씀을 듣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말씀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상과 봉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친했던 벗 라자로의 두 여동생으로부터 이 관상과 봉사의 모범을 보셨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주로 행하던 복음선포 활동에서 지칠 때마다 예루살렘 근처 베타니아에 있는 라자로의 집으로 와서 쉬곤 하셨는데, 예수님을 포함한 일행을 수발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언니 마르타는 봉사의 달인처럼 일행을 편히 쉴 수 있고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또한 복음선포 활동에서는 늘 무언가를 요구하는 군중으로부터 시달리셔야 했고 그러면서도 그 군중에게는 도통 알아듣거나 믿으려는 기미가 없었던 반면에,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듣고자 했고 또 알아듣는 기미도 보여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잘 들어주는 마리아의 몫도 감사히 받으셨습니다. 

 

4. 그 이후 교회의 역사에서는 또 다른 아브라함들과 바오로들 그리고 마르타와 마리아들이 말씀에 담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고자 노력했고, 또 그 속에 감추어진 신비의 가치를 드러내고자 노력했습니다. 참으로 오묘한 섭리로 복음의 진리를 이 땅에 들여온 한국교회의 교우들도 그러했습니다. 한민족 가운데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신앙의 진리를 깨달았으며 교회를 세운 이벽, 또 그와 함께 강학회를 통해 신앙 진리를 깨닫게 된 후에 세례를 받고 함께 교회를 이루었으며,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서 성사에 대한 열망을 선교적 성과로 일구어낸 이승훈과 동료 선비들, 또 이들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한 후에 박해가 들이닥치자 신앙을 포기하기는커녕 그 신앙 진리가 이미 오래 전부터 한민족이 알아온 하느님의 신비가 뒤늦게 전해진 것임을 알아차리고 이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심산유곡을 찾아들어 교우촌을 세운 서민 출신의 평신도들, 또 고문에 못이겨 입술로 배교했으나 더욱 신앙에 정진하며 자손들에게 순교정신을 물려준 치명자의 후손들이 다 그러했습니다. 

 

5. 그들이 말씀에서 알아듣고 드러내고자 했던 가치는 크게 자유와 평등, 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 있고 양심에 따라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그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또 만민이 평등하며 남녀가 동등해야 한다는 가치 또한 그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매우 부당하게도 신분으로 나누어 제도적으로 차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귀한 자녀들로서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를 누려야 하고, 또 각자의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평등하게 누려야 함을 목숨을 걸고서라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선시대까지 군주 한 사람이나 성리학 이데올로기로 통치하던 유림에게 나라를 맡기기보다 백성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주체성이 필수적이었고, 박해시대 백 년 간 전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세운 교우촌은 바로 이 주체성으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앞당겨 실현했던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한민족 역사 반만년 가운데에서 이러한 자유와 평등의 가치관을 피지배계층이 독자적으로 추구한 나머지 지배층에 저항한 역사는 여러 번 있었지만, 대부분은 민란으로 일어났다가 곧 진압되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의 경우처럼, 그 어떠한 무기도 들지 않고 평화적으로 맞섰던 데다가 무려 백 년이나 저항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조선왕조를 포함한 한민족 역사에서 유일무이합니다. 이는 자생적으로 복음을 들여오게 하신 오묘한 섭리 이상으로 오묘한 섭리입니다. 그들은 비록 2만 명 이상이 목숨 걸고 증거하는 덕분에 자신들을 박해하던 왕조와 유림에게 승리하였고, 향후 아시아와 온 세상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6. 교우촌에서 내세운 이 같은 천주교 신자들의 가치를 전해 받은 동학교도들은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무장혁명을 일으켰습니다(1894). 그러나 그들이 갖춘 무장이라야 기껏 죽창이었으므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전원 몰살당하고 강제합병의 빌미만 주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교훈을 거울삼아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지도부는 강제합병 후 십 년만에 개신교, 불교와 손잡고 비무장 만세운동을 일으켰는데(1919), 이때 작성된 독립선언문에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와 함께 평화적 저항 원칙을 관철하고자 했습니다. 당시 전 인구의 1/10이 들고 일어난 만세운동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세웠고,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으로 정했고, 장차 독립 후 세울 나라의 헌법 초안으로 <건국강령>을 선포했습니다(1931). 

 

7. 이 강령은 더 이상 군주가 통치하지 않고 백성이 다스리는 민주주의 하에서, 백성이 이익과 권리를 고루 누리는 민족균등주의를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대내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고, 나라의 재산을 고루 나누며, 나라의 세금으로 배울 권리를 충족시킴으로써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이었고, 대외적으로는 민족자결의 권리를 천명하여 외세에 의해 백성의 운명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패망하고 나라를 되찾은 후에 이 <건국강령>을 바탕으로 제헌헌법을 만들어 새 나라를 세웠습니다. 

 

8. 그리하여 왕조나 유림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의 주체성은 제헌헌법 제2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에 반영되었습니다. 신분으로 차별받던 평등의 가치는 제헌헌법 제8조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 평등이며 성별, 신앙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조항에 반영되었습니다. 양심을 부정당하던 자유의 가치는 제헌헌법 제28조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써 경시되지는 아니한다”는 조항에 반영되었습니다. 이후 아홉 차례나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4·19 혁명으로 인한 1960년과 6·10 항쟁으로 인한 1987년에 단행된 개정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일곱 차례의 개정이 모두 권력자의 자의적인 욕심으로 개정된 것이었고, 그래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 실현 범위가 축소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역대 헌법 중 가장 자유와 평등 가치에 진보적인 헌법이 제헌헌법입니다. 

 

9. 요컨대 제헌헌법에는 근세 이래 백성이 바라던 가치들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천주교 신자들, 동학교도들과,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한 2백만여 명의 만세시위꾼들,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던 독립운동가들을 비롯한 민족 구성원 대다수의 꿈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나라를 세우는 건국과정이 늦었던 까닭에, 우리보다 앞서 나라를 세운 여러 나라들, 프랑스, 미국, 독일 등에서 먼저 만들어 놓은 헌법의 좋은 요소들을 모두 참고할 수 있었습니다. 이 덕분에 헌법의 내용만으로 보면 가장 늦은 만큼 가장 좋은 헌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독재자들이 자꾸 손을 대서 후퇴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지요. 

 

10. 하느님의 섭리는 악이 기승을 부릴수록 그 악을 발판으로 삼아서 당신의 선을 드러내십니다. 바벨탑에서 이어진 수메르 문명의 우상숭배 풍조가 지겨워서 탈출한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을 시작하였듯이, 조선왕조의 야만적인 박해를 피해 세운 교우촌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스스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실현하는 자치를 이룩함으로써 한민족의 문명을 앞당길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박해와 이단적 밀교로부터 고난받던 콜로새 교우들을 격려하느라 사도 바오로가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말씀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이 편지로 기록되어 성경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보다 더 야만적인 식민통치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짓밟았던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느라 친일파를 제외한 온 백성이 떨쳐 일어났던 삼일만세운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여금 <건국강령>을 만들게 하고 끝내 대한민국 제헌헌법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추어진 신비를 말씀으로 드러내자면 그에 담긴 가치를 알아듣고자 하는 마리아와 함께 이 가치를 행동으로 실현하려는 마르타가 다 함께  필요했듯이, 제헌헌법에 담긴 주체성과 자유와 평등의 가치에 대하여 이를 깨닫는 마리아의 몫과 이를 실현하려는 마르타의 몫을 둘 다 실행하는 파수꾼이 필요한데 그들이 바로 종교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