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미카 2,1-5; 마태 12,14-21 /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2022.7.16.; 이기우 신부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마태오는 이사야의 이 예언이 예수님께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심성으로 올바름을 승리로 이끄셨던 생애에 적중한다고 보아 자신의 복음서에 인용하였습니다. 사실, 이사야 예언자는 당시 메시아를 기다리던 백성 일반의 기대와는 다르게, 장차 오실 메시아는 고난받는 종일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그 고난의 원인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도 내다보았습니다. 예언자로서 그가 지닌 상상력과 통찰력은 실제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시는 자리에서 이사야 예언을 인용하심으로써 그 정확성이 입증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그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신 메시아께서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 안에 성령으로 현존하심으로써 이룩된 올바른 현실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누릴 참된 행복에 대해서는 역시 마태오가 산상설교와 특히 진복팔단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여기서도 슬픔은 있으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고난은 없어지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이 슬픔을 겪을 때 위로하시고 의로운 이들이 박해를 받을 때 하늘 나라의 상급으로 격려하십니다. 부활하신 메시아께서 수행하실 이 역할과 섭리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 또 이 역할과 섭리를 믿기는커녕 불의를 꾀하고 악을 꾸미는 죄인들에 맞서기 위해서 일으키시는 표징이 있습니다.
이 표징은, 믿는 이들이 아파하거나 고통받을 때 치유와 위로를 주시는 것이기도 하고, 악한 자들이 불의를 꾀하고 악을 꾸밀 때 천상의 기쁨을 박탈하시고 제 꾀에 걸려 넘어지게 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믿는 이들에게 더 큰 역할과 사명을 부여하시고자 할 때 확신을 주시기는 것이기도 하고, 악한 자들이 죄악으로 사람들을 유혹할 때 갈라서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선벌악(賞善罰惡)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관철하시고자 일으키시는 표징을 세상에서는 기적이라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표지라고 보아서 ‘표징’이라 일컫지만, 세상에서는 상식과 자연질서를 넘어서는 신기한 일이라고 보아서 ‘기적’이라 말합니다. 또 믿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치유와 구마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드러내실 때 기적이라고 놀라워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을 체험한 이들에게 생겨나는 믿음이 기적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자들이 놀랍고도 분노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표징이라 부르든 기적이라 부르든 관통되는 것은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시려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아시리아의 산헤립 임금이 남유다왕국을 침공해 왔을 때, 히즈키야 임금은 우상숭배 풍조에 빠지지 않고 또 이집트의 세력에 의지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 백성의 애국심에 기대어 물리쳐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며 하느님께 매달리다시피 기도바쳤습니다. 이 기도를 들으신 하느님께서 이사야를 시켜 특별한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히즈키야를 살리시되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꾼으로 더 쓰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표징에 대한 기록은 이사야 예언서 38장에만이 아니라 열왕기 하권 20장에도 병행되어 나오는데, 부왕 아하즈가 아시리아에서 들여온 해시계의 눈금에 비치는 그림자를 열 칸이나 뒤로 돌리는 기적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이러합니다. 시간이 뒤로 가려면 자전하던 지구가 거꾸로 돌아야 가능한 일입니다. 지구는 한 시간에 1,660km나 가는 매우 빠른 속도로 자전하는데, 이 속도에서 방향이 바뀐다면 지구상에 있는 모든 물체가 대홍수에 맞먹을 정도로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특히 바닷물은 큰 해일이 되어 모든 바닷가 마을을 덮칠 것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이런 재앙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합리적 해석은 빛의 굴절로 보는 것입니다. 해가 뒤로 가거나 지구가 거꾸로 돌지 않아도, 정상적으로 비추이는 햇빛이 물기를 머금은 구름에 의해 굴절되어 지상에 전해진다면 해시계의 눈금이 앞으로 가거나 뒤로 가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한 현상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사야가 이를 이용해서 히즈키야에게 하느님의 권능을 확신시키고 남유다왕국의 회개를 위해서 왕정을 잘 펴게끔 용기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를 지닌 이들을 치유해 주신 기적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표징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당사자가 조금이라도 그분께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는 경우에라야 현실화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100이라면 신적 권능의 비율이 99%나 되어야 하지만, 나머지 1%를 채우는 것은 당사자의 믿음입니다. 그 1%를 위해서 해시계의 눈금을 돌리는 표징을 하느님께서는 이사야를 시켜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1%에 투자하고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메시아에게 당신의 영을 부어주셔서 올바른 세상을 이룩하게 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메시아 백성인 우리에게도 언제나 99%의 권능으로 올바은 세상을 위한 기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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