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수성구 2022. 7. 17. 02:45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연중 제16주일: 다해

복음: 루카 10,38-42: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2) 이 말씀은 제1독서의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의 이야기와 주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인 마르타와 마리아에 관한 일을 보여주면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손님 접대의 의무를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다. 이 손님 접대의 의미는 다른 사람들 안에서 주님의 모습 자체를 알아보도록 해야 한다는 신앙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은 누구이든 간에 모두가 다 하느님 또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메시지 표지로 삼으신 그들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사람 등으로 나타나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이는 단순히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 하나를 대접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거나, 베타니아에서 마르타와 마리아의 환대를, 카파르나움과 예리코에서 마태오와 자캐오의 환대를,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의 초대를 무시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던 그리스도 자신을 대접하는 것이다. 이제는 이기주의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사랑과 우정의 축제를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 말하자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천사들과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새로운 아브라함의 천막이 될 수 있고, 또한 진실한 열정과 사랑을 가지고 바로 그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새로운 베타니아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는 정성과 사랑으로 가득 찬 나그네 대접의 표본이 되고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무엇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두 자매의 서로 다른 태도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두 자매는 서로 다른 방식이지만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그분께 자신들의 사랑을 바쳐드리고자 한다. 마르타에게 중요했던 것은 갑작스럽게 오신 주님께 훌륭한 식사를 마련해 드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도와주지 않는 것이 짜증이 났다. 그래서 주님께 제 뜻을 거들어 달라고 청한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40절) 그러나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고, 예수님의 현존과 말씀으로 자신을 풍요롭게 채우는 것이었다. 그분이 찾아오시는 것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39절)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순종하는 자세로 진리와 사랑의 가르침을 듣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말에 마리아를 옹호해 주신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1-42절) “필요한 것은 한 가지”(42절), 예수님을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되면 식사나 음식은 이차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런 의미에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42절) 그가 선택한 것은 상해버리거나 없어져 버리지 않는 그러한 몫을 택한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마지막 날에 완성될 실체이다.

 

마르타와 마리아가 동시에 공존하고 있다.

주님을 맞아들이는 데 두 자매의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보완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마르타의 잘못은 주님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데 몰두한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41절)하여 그 일의 결과를 돌려드려야 할 대상인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신자들이 떨어지기 쉬운 위험은 행동주의에 빠져 “내 활동이 모두 기도다.” 하면서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자기 자신만 찾게 된다.

 

반면에 오직 귀 기울여 들으려는 자세와 자신을 비울 수 있고,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내용과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마르타는 스승의 메시지를 우선 내면 깊숙이에 새겨듣는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분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분을 알리고 그분을 특별한 상황에 있는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안에서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마르타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려면 더 깊은 관상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42절)임을 알게 되면 쓸데없는 일들에 시간을 덜 낭비하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도 예수님께서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알아, 그분으로 자신을 채울 뿐만 아니라, 그분의 모습을 닮고 그 모습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을 통해 그분도 채워드려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순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것보다도 주님의 뜻을 헤아려 우리가 그분으로 채우는 동시에 그분의 모습인 우리 이웃들을 통하여 그분의 배고프심과 목마르심을 채워드리는 손님 접대, 이웃 사랑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이러한 삶의 은총을 청하며 살아가도록 결심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