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세 가지 차원

수성구 2022. 7. 18. 06:20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 세 가지 차원

 

미카 6,1-8; 마태 12,38-42 /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2022.7.18.; 이기우 신부

 

  지난 주 금요일에는 안식일 논쟁과 관련하여 인간이 하느님과 소통하는 방식인 제사와 기도의 기본 지향이 찬미와 감사, 속죄와 청원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 소통 방식의 지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간추려 발간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 가르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 보면, 미카 예언자 역시 인간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 방식에 대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맺어야 하는 구원의 세 가지 차원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회적 차원에서 공정의 윤리를 실천하는 것이 구원의 첫 번째 차원이라면, 대인관계에서 인간적 신의를 맺은 사람들이 한데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구원의 두 번째 차원이고, 그러고 나서 각자가 영혼의 깨어남을 위해 종교적 겸손으로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것이 구원의 세 번째 차원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다. 이 현존 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과 소통하는 방식인 찬미와 감사, 속죄와 청원의 지향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구원의 차원과 소통 방식 그리고 기본 지향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퍼지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초점이 되고 있는 하느님의 표징은 이 자비의 실천 내지 확산 과정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표징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자신의 그토록 철저한 율법 준수의 열성을 통해서는 그 어느 표징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수많은 표징들을 일으키시는 데 대해서 질시어린 감정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읽으시고 그들에 대하여 이렇게 차갑게 대꾸하셨습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악하고 절개없는’ 자들로 비쳤습니다. 이어서 당신이 염두에 두고 계시는 표징, 이제까지 일으키셨던 표징들보다도 더 크고 중요한 표징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었고, 이를 요나와 솔로몬를 소환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드신 요나의 비유는 이런 뜻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라고 파견되었던 요나가 그 소명이 엄두가 나지 않아서 도피하다가 고래 밥이 된지 사흘 밤낮을 고래 뱃속에 있다가 다시 나온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과연 어떨지, 특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또 어떨지 두고 보자는 뜻이었습니다. 당신의 설교는, 특히 십자가를 짊어지는 행동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요나의 설교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왕국의 임금이 된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여 왕국을 잘 다스리자 남방의 시바 여왕이 그의 지혜를 들으려고 찾아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치셨고 이 지혜는 솔로몬의 지혜보다 더 큰 지혜였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보다 더 큰 지혜는 물론, 십자가로 부활하는 지혜였습니다. 이 지혜로써 감추어진 신비가 말씀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로 십자가와 부활의 지혜에 담겨 있던 신비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수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도 부활 신앙으로 새 사람이 되는 은총은 덤입니다. 

 

  예수님의 설교와 지혜가 사실 그 어떠한 표징보다 더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깨닫게 해 줄 수 있어서입니다. 설교를 듣고 지혜를 깨달을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사회적 차원에서 공정한 윤리를 지켜야 하고, 그 다음 우리네 인간관계에서 신의를 지켜야 하며, 그리고 종교적으로도 겸손하게 하느님 현존을 찾아서 그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제사와 기도의 소통 방식을 통해서 찬미와 감사, 속죄와 청원이라는 기본 지향이 가동되어야 하지요. 

 

  그렇게 해서 우리네 실존이 정상화되면,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의 응답이 들려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비라는 하느님의 떨림이 우리네 양심을 울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표징입니다. 또한 먼저 살다간 이들 중에서나 동시대인들 가운데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사회적 실천으로 옮긴 의인들의 행동이 우리네 의식을 깨우치기도 합니다. 이것도 표징입니다. 이 두 과정을 통해서 우리네 삶도 드디어 하느님의 자비를 관계에 있어서나 사회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게 되면, 이 행동이야말로 교회적인 표징이 됩니다. 하느님을 보지 못해 믿지 못하겠다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 있는 한,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사는 한, 표징적인 존재입니다. 한 조각의 믿음을 지니지 못해서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눈으로는, 우리는 각자의 믿음만큼 하느님을 살게 되고, 또 그만큼 자비를 실천하게 되며, 삶으로 증거되는 자비만큼 우리네 믿음이 정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