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 오늘의 예수님 수난기
History Story & the Passion of Jesus of the Day
사랑이란 다 주어도 아깝지 않는 베푸는
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Love is said to be love that is not too much to give.
그러나 마음을 나누는 것이 쉽지가 않는데
모든것이 우리네 사람의 사랑이라고 본다.
그러곤 나의 마음속에 자릴하는 그 무엇도
이젠 햇살 처럼 따스한 온기를 불어 주는가 보다.
살아 가는데 힘이 들고 어려운 시기가 사람마다
반드시 온다.
People come to difficult times when they are hard to live.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한 때는 불행의 도가니 속에서의
아픔을 맛보고 살아 온거라 한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안에 맑음이 있고 꾸정물 같은 혼탁한 마음이 있다.
So there is a clearness in our hearts and a turbulent mind like a stylobate.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그리도 혼탁한 자신의 생활을 걷어내는
현명함이 묻어 난다고 본다.
그래서 사람이 모든거 이룰수가 없지만 그래도 마음 하나
진실함을 호소 하기도 한다.
이제 푸릇 푸릇 믈들어 가는 봄의 길목에서 혼자라도 그 따스함을
누리는 기쁨에 살아 보려 한다.
살아 가면서 사람마다의 향기가 있다는데 난 무슨 향기의 냄새를
풍기고 있나를 생각한다.
I think that there is a smell of each person as I live, and I think what smell is blowing.
나의 향기는 진실속에 담긴 순수한 향이 나의 어느 향수 보다 더 진하다고 한데
그러한 사람의 올바른 향기는 멀리서의 인품을 드러내나 싶다.
오늘은 아침에 성당엘 가서 미사를 지내면서 오늘의 우리 보좌 신부님의
거룩한 말씀이 선입견과 아니 편견과 선입견에 대한 강론 이시다.
오늘의 복음에서 이야기 하시는데 예수님이 하신 일이 모두
하느님의 일이라고 한다.
He speaks in today's gospel, and all Jesus did is God's work.
그래서 우리는 믿음이라 한데편견과 선입견을 버리고 믿으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살게 한다고 한다.
역대 보좌 신부님들 보다 우리 주임 신부님 보다 더 핵심을 잘 잡고선 강론을 잘하시는데 일등이다.
그러곤 아침에 미사 마치고는 우리 에디따랑 둘이서 집으로 같이 오는데
일부러라고 그런지 내게 위안을 주는 말이 나를 참 따뜻하게 한다.
내가 요즘 아파서 허리가 꾸부정하다 하니 다른 사람들 완치되는 분들이
많다면서 "형님도 나을거야" 라는 말이 벌써 50%나 다 나은거 같다.
I am sick these days and my back is so bad that there are many people who are cured.
"My brother will be better" seems to be already 50% better.
아픈 사람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 더 아픈데 긍정적인 말을 들으니
아픈것도 나은거 같이 아프지 않다.
그러고는 오늘의 진짜 복음은 ㅋㅋ 예수께서는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Then the real gospel of today is Jesus said, "I have a bigger testimony than John's testimony.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You have never heard his voice, and you have never seen him.”
그분은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며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생활해야 한다.
이 사순시기에 더욱 그분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난 세월의 역사이야기를 잠깐 들어 보자.
Let's listen to the history of the past years for a moment.
이조왕릉 역사기행 8화 : 경종과 선의왕후 의릉 탐방기
<사진설명>
서울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 제20대 경종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 능이다, 일반적으로 좌우 능인데 의릉은 상하 능이다.
[역사이야기] 이조왕릉(李朝王陵) 역사기행(历史记行) 8화(话): 의릉(懿陵)
순례(巡礼) 탐방기행(探访纪行)
♤의릉(懿陵) : 조선 제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 능(陵)♤
의릉은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32길 146-37(석관동)에 위치한 세계문화유산 유적지로 지정된 조선 제 20대 경종(景宗)과 그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가 안장되어 있는 능(陵)이다.
의릉 주위에는 1972년 7월4일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했던 구 중앙정보부 강당 건물이 있고, 이문동 한국외국어대학교 캠퍼스, 석관동 한국예술종합학교 캠퍼스가 위치해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 왕릉의 쌍릉(雙陵)은 좌우로 조성되나 의릉은 왕과 왕비의 두 봉분을 앞뒤로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형식 (또는 상하이봉릉·上下異封陵 형식이라고도 부름)으로 조성한 것이 특이하다. 능역 위에 경종의 능이 그 아래에 선의왕후 능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풍수지리적 이유 즉 능역의 폭이 좁아 산천의 좋은 기운이 흐르는 맥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능을 위 아래로 배치한 것이며 또한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이유라고 한다. 이런 동원상하릉 형식은 여주 영릉(寧陵·제 17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능)과 의릉 두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의릉에 들어서면 홍살문 앞에 금천이 흐르고 그 위에 금천교가 있으며, 정자각은 정청이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양쪽에 1칸씩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따라서 여느 정자각보다 규모가 크고 웅장해 보인다.
경종은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희빈 장씨(張氏)와 숙종의 장남으로 1688년(숙종 14년) 태어나 1670년(숙종 16년) 세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17년(숙종 43년)에 3년간의 청정대리를 끝내고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1720년에 경덕궁(경희궁)에서 즉위하였다.
경종(景宗)의 생애는 어릴 적부터 편치 않았으며, 재위 4년 동안 신임사화(辛壬士禍) 등 당쟁이 그치지 않았고 소생 없이 병약하여 재위 4년 만인 1724년 창경궁 환취정에서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를 두고 비운의 왕이라고 부른다.한편에서는 경종의 죽음에 대해 독살설도 있으나 확인된 기록은 없는 상태다.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는 함원부원군 어유구(魚有龜)의 딸이며,
세자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1718년(숙종 44년)에 사망하면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다.
1730년(영조 6년) 경희궁 어조당에서 26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景宗)이야기♤
경종 이야기를 하려면 경종의 생모 장희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장희빈 이야기는 2021년 1월19일 올린 이조왕릉 역사 기행 4화 서오릉 탐방기에서 대빈묘(장희빈 묘)에서 이미 올렸다. 여기서는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고 부르는데 왜 그렇게 부를까를 고찰해 본다.
실록에는 경종이 병들고 허약했던 왕이었다는 기록 뿐 왜 병약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다만 실록과 야사로 면면을 짐작해 볼 뿐이다.
경종의 아버지 숙종 임금 역시 자식 교육에는 엄격했다. 경종 역시 부왕의 바램대로 4살 때 천자문을 떼고 8살 때 성균관 입학례를 신하들 보는 앞에서 치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린 시절 영특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반 왕자들과 다를 바 없이 잘 자라났다.
그러나 경종이 14살 때 생모인 희빈 장씨가 아버지가 내린 사약을 받는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자신의 거처에 신당을 짓고 인현왕후를 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던 날 희미한 꼬리를 남기고 자취를 감춘 심상치 않은 혜성이 궁궐의 밤하늘에 보였던 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서는 이날의 정황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사약을 받은 희빈 장씨는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고 숙종에게 애원을 거듭했다. 숙종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한때 부부의 연을 맺었던 여인의 마지막 소원을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결국 세자를 희빈 장씨에게 데려다 주었고, 이때 예기치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독기서린 눈빛으로 변한 희빈 장씨가 세자에 달려들어 세자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 버린 것이다. 곁에 서 있던 환관들이 겨우 세자에게서 장씨를 떼내어 놓았지만 세자는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이 일화는 장희빈의 간악함을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야사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경종에게 있어 어머니 장희빈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종은 평생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병환에 시달렸고 자식도 낳지 못한 채 승하하고 말았다. 어쩌면 경종의 짧은 인생은 혜성이 남기고 간 흔적이 아니었을까.
경종은 아버지 숙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태어나서 돌이 지난 후 바로 왕세자가 되고 거의 30년을 왕세자로 지냈지만 거의 원인모를 병환에 시달려 재위기간 4년동안 업적을 남길 기력도, 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록 몸은 성치 못했지만 천성이 착하여 경종의 따뜻한 성정이 실록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실례로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는 아니었지만 인현왕후를 마음으로 섬겼고, 살아서 자신에게 몹시도 엄한 아버지였지만 숙종이 병석에 들때 마다 십수 년동안 약시중을 거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실록은 경종 사후에도 경종은 아량이 넓어 신하들의 좋고 나쁜 간언들을 마음을 열어놓고 받아들였으나 이상적인 정치를 보좌할 충직한 신하들을 찿지 못한 한스러움이 표현되고 있다.
또한 경종은 살아 생전 37년동안 정비 단의왕후 심씨와 계비 선의왕후 어씨 외에 일체 후궁을 두지 않았다. 이로 미루어 보아 천성은 곱고, 효성도 지극하고, 주색을 멀리하며 가정적인 왕이었으나 자식복과 처복이 없는, 늘 병환으로 신체적으로 고통이 많아서 제대로 정사를 펴지 못한,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의 왕'이라고 세인들이 안타깝게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좋으신 이야기는 들어 보면 참으로 우리는 뿌리가 깊은
조선의 민족이라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 가야 되는가 본다.
If you listen to such a good story, we really think that we should
live with pride because we are a deep-rooted Joseon people.
오늘 햇살이 너무 좋아서 창문을 열고선 나의 이야기 역사이야기에
섬취하고는 한다.
오늘도 주님과 성모님의 은총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Today, I am spending my day in the grace of the Lord and the Virgin,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사랑합니다.
Thank you, healthy, I love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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