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수성구 2017. 1. 10. 08:36

2017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히브 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복음 마르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어떤 분께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했는데 상대방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은 미안한 마음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을 다했는데 전혀 사과를 받아주지 않아서 답답하다는 것이었지요. 사과를 받아주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요? 대범하지 못해서 그럴까요? 이 사람에게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일까요?

대범하지 못한 것도 아니고 사랑의 마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과를 하는데도 진정성이 있는 깊은 반성이 필요한 것처럼, 용서하는 것 역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용서를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약 사과를 했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 괜찮아. 전처럼 편하게 지내자.”라고 즉시 사과를 받아준다면 문제가 더 클 수가 있습니다. 진정성 있는 용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가 사과를 했는데 어떻게 안 받아줄 수 있어?’라면서 상대방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상대방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진정성이 있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사랑을 상대방이 느낄 수 있을 때, 마찬가지로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진정성이 있는 마음, 사랑의 마음이 있을 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입 밖으로 내뱉은 말과 눈에 보이는 행동만으로 모든 의무를 다했다는 착각 속에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만이 진정한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 해당합니다. 그 시작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향한 이 고백이 틀린 말일까요? 전혀 틀리지 않았고 분명히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듣기 싫다는 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틀린 말이 분명히 아닌데 왜 조용히 하라고 하셨을까요? 이 말에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 있지만 의미가 없는 말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말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향해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는 행복하다.”(마태 16,17)이라고 칭찬의 말씀을 하시지요. 왜 똑같은 말인데 누구에게는 칭찬을, 누구에게는 호통을 치실까요? 사랑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고백에는 과연 사랑이 담겨 있는지 혹시 그저 입으로만 내뱉는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말은 아닌지를 반성해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라고 혼내시는 것은 아닐까요?

지구상의 모든 음악 중 하늘 저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음악은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의 고동 소리다(헨리 워드 비처).


마귀를 쫓아내시는 예수님.


사랑이란?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려졌습니다. 젊은 남성이 한 여성에게 결혼해달라는 구애였지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결혼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남자는 결혼 후에 아내를 끊임없이 의심을 합니다.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다는 의심,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는 의심 등등…….

이 남자는 아내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랑이란 죽음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생명과 연관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으면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구속하고 통제하려는 욕심과 이기심만이 보일 뿐입니다.

사랑이란 혼자만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함께 하는 것이며 그래서 의미 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헛된 삶은 혼자서만 말하고 자기 의심에 사로잡히는 삶입니다.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에 갇혀서 이상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사랑이란 어떤 사랑인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랑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일까요?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