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 | 제1독서 이사 60,1-6 예루살렘아, 1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 2 자 보라,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3 민족들이 너의 빛을 향하여, 임금들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향하여 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네게로 온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에서 오고,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 온다. 5 그때 이것을 보는 너는 기쁜 빛으로 가득하고, 너의 마음은 두근거리며 벅차오르리라. 바다의 보화가 너에게로 흘러들고, 민족들의 재물이 너에게로 들어온다. 6 낙타 무리가 너를 덮고, 미디안과 에파의 수낙타들이 너를 덮으리라. 그들은 모두 스바에서 오면서 금과 유향을 가져와, 주님께서 찬미받으실 일들을 알리리라. 제2독서 에페 3,2.3ㄴ.5-6 형제 여러분, 2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나에게 주신 은총의 직무를 여러분은 들었을 줄 압니다. 3 나는 계시를 통하여 그 신비를 알게 되었습니다. 5 그 신비가 과거의 모든 세대에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금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거룩한 사도들과 예언자들에게 계시되었습니다. 6 곧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마태 2,1-12 1 예수님께서는 헤로데 임금 때에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 그러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2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루살렘이 깜짝 놀랐다. 4 헤로데는 백성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5 그들이 헤로데에게 말하였다.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6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 7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 8 그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하였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그들은 임금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났다. 그러자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
중고등학교 때에 제가 제일 좋아했고 또 자신 있는 과목은 수학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수학과 연관 있는 쪽으로 진학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수학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연관되어 있는 과목이 있다고 하면 ‘논리학’ 정도라고 할까요? 신학교에서 배우는 철학, 신학, 성서 등의 과목들은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과 함께 신부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공부해야 할 뿐이었습니다. 당연히 공부가 힘들었고 어렵게만 느꼈습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수능의 수리 시험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옛날 생각을 하면서 ‘한 번 풀어볼까?’하면서 문제를 보다가 얼른 시험지를 덮었습니다. 왜냐하면 도저히 풀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긴 수학을 접하지 않은 지가 벌써 30년이 되었으니 어떻게 풀 수가 있겠습니까? 그에 반해서 신학교에서 어렵다고 느껴서 힘들었던 철학, 신학, 성서 등은 지금 어떨까요? 당시에는 힘들기만 했지만, 30년 동안을 계속 접하다보니 이제는 어렵지도 또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계속 여기에 연관된 책을 보면서 생활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적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꾸준히 노력할 수 있다면 충분히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너무 일찍 포기하는 마음이 아닐까요? 이 포기하는 마음이 희망을 잃게 만들고, 그로 인해 할 수 있는 것들도 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의 입구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다고 하지요.
‘일체의 희망을 버려라.’
일체의 희망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포기하려는 마음을 가질 때 그만큼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대로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은 천국이라고 불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오늘은 주님께서 공적으로 세상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낸 날을 기념하는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까? 바로 동방의 세 박사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이 동방의 세 박사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그들은 별만을 보고 경배하기 위해 동방에서 찾아왔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편리하지도 않았습니다. 치안도 불안해서 먼 곳으로의 여행은 생명의 위협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먼 곳을 찾아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오랫동안 메시아를 찾고자 했던 희망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메시아를 만나겠다는 마음이 먼 곳으로의 여행도 두렵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간절한 마음과 노력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만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까요? 희망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분명히 메시아이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이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져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헬렌켈러).
불의의 사고로 주님 곁으로 간 동창신부 묘지. 의미 있는 삶 저는 지금까지 장례미사를 많이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이 미사 때의 강론을 준비하다보면 잘 써지는 경우도 있고, 또 반대로 전혀 써지지 않는 경우가 있더군요. 잘 써지는 경우는 어떤 때일까요? 살아 계실 때에 의미 있는 삶을 사셨으면 그만큼 할 말이 많아집니다. 그에 반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신 분, 그래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셨던 분의 경우에는 할 말이 적어지면서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뿐입니다.
어제 동창신부가 묻혀있는 인천 교구의 성직자 묘역을 다녀왔습니다. 동창신부의 묘지 앞에서 기도하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마음속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동창신부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많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 있었던 일, 또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제로 살면서 함께 있었던 일들을 묘지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게 됩니다.
문득 ‘나의 장례미사 때 어떤 강론을 해 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나를 바라보면서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는 생각도 해 봅니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기억에 남을 수 있는 삶을 산다면 얼마나 의미 있는 삶일까 싶네요.
인천교구 성직자 묘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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