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

수성구 2017. 1. 9. 06:43

2017년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9일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 42,1-4.6-7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복음 마태 3,13-17

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14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15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16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17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미복잠행(微服潛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에 임금이 민생을 직접 살피기 위해서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수수한 차림으로 다녔던 것을 말하지요. 실제로 조선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이렇게 미복잠행을 했던 서술을 볼 수가 있습니다. 백성들의 생활을 자신이 직접 봐야지만 어떻게 국정운영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종종 정치인들이 공개하는 민생투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이 민생투어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단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목적이 더 커 보이는 생색내기와 홍보용으로만 보이기에 공감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진정으로 국민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냥 한 번 방문하는 일회적인 행동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재래시장 한 번 방문한 것으로 시장 사람들의 어려움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독고노인들의 삶이 비참하다고 하는데, 그들을 한 번 찾아갔다고 해서 온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과 함께 해야지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치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솔직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힘으로 인간의 모든 부조리들을 없애버리고 사랑과 정의가 넘치는 세상을 직접 만드시는 것이 더 옳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취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보여주기 위한 것도 또 생색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에 완전히 똑같이 인간이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강생하셨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세례를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해집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하느님께서 고개를 숙여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토록 큰 겸손을 보여주신 이유는 우리 역시 그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겸손의 삶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내려왔으며,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사랑을 위해 스스로 낮추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얼마나 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삶을 살고 있었을까요? 그 반대인 내 자신을 높이고 자신의 뜻만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교만과 욕심의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 역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낮출 수 있는 겸손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큰 나무도 가느다란 가지에서 비롯된다. 10층탑도 작은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데서 시작된다.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처음과 마찬가지로 주의를 기울이면 어떤 일도 해낼 수 있다(노자).


주님의 세례.


성경을 보면서 기쁘십니까?

오늘 갑곶성지에는 저와 함께 할 신부님 한 분이 오십니다. 갑곶성지 내에 50주년 기념 영성센터가 있는데, 이곳 센터장으로 오시는 것이지요. 사실 지난 1년 동안 휴가 한 번 가지 못하고 성지를 지켰거든요. 따라서 저와 함께 할 이 신부님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래서 오자마자 이제 여행도 틈틈이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에 국내 여행안내 책을 한 권 구입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괜히 그 장소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괜히 웃음이 나고 신납니다.

문득 성경을 보면서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고 신나야 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구원의 기쁨이 담겨 있는 책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면서 바라본다면 당연히 기쁘고 신나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러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 안에서의 행복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요? 좀 더 구체적으로 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을 때 분명히 성경은 기쁨의 책, 희망의 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새로 오실 신부님께서 갑곶성지 안에서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실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