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수성구 2017. 1. 5. 05:34

2017년 1월 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5일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 1요한 3,11-21

사랑하는 여러분, 1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복음 요한 1,43-51

그 무렵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갑곶성지의 밤은 아주 조용합니다. 그래서 밤에 성지를 산책하면 이렇게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에 살고 있는 제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누구는 일부러 찾는 곳을 저는 이곳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어떤 분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이렇게 넓은 공간에 혼자 살면 정말로 힘들겠습니다.”

그러면서 외롭지 않느냐, 무섭지 않느냐 등의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십니다. 어렵고 힘든 점만을 생각하면서 갑곶성지를 바라보면 살기 힘든 곳이 되겠지만, 좋은 점 그리고 긍정적인 부분들을 생각하면 이곳보다 나은 곳은 하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에서 쓸모없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창조물 안에서든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신비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면 삶 자체가 놀랍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신비들에 둘러 싸여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대충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죄스러운가 싶습니다. 그 신비와 아름다움을 두고 부차적인 것들에 눈을 팔며 산다는 것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것일까요? 분주히 오가다 허겁지겁 생을 마감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하느님의 신비 속에서 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깊이 묵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정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주님을 향한 마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나타나엘은 아주 간단히 자신의 생각을 말합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그는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또한 가까운 지인인 필립보를 만나 예수님에 대해 들었지만 나자렛에서는 특별한 인물이 나올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무시하려고 하지요. 마치 시골 출신인 사람이라고 무시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선입견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선입견이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서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인정할 만큼 올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놀라운 신비를 깨닫고 자신의 선입견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곧바로 뉘우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알아보지 못해서는 안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잘못된 길에서도 곧바로 방향을 바꿔 주님을 향할 수 있습니다.

행동해야 할 때 행동하면 행동해도 허물이 없고, 말해야 할 때 말하면 말해도 후회가 없다(유도원).


1월 6일에 서품받을 대상자들과 신학교 교수 신부들입니다.


감사합니다.

내게 어떤 도움을 주었을 때 우리들은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예를 들어, 식당 같은 곳에서 특별한 서비스나 친절함을 받게 되면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합니다. 즉, 친절함을 느꼈을 때, 특별한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는 감사의 표시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의 표시를 하는 사람은 90% 이상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감사의 표시가 50% 이하로 줄어들 때가 있습니다. 과연 언제일까요?

가족과 같이 가까운 사람에게는 감사의 표시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맛있는 식사를 해 주는 것, 집안 청소와 정리를 하는 것, 심부름을 하는 것 등등에 대해서 감사의 인사를 좀처럼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무관심 속에서 사랑이 가득해야 할 곳이 오히려 아픔과 상처가 가득한 곳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까운 사이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감사하다고 표시하고 더 많이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감사와 사랑을 직접 말로 표시하면 18.5% 더 행복해진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이 감사와 사랑을 표시해서 행복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스라엘 성지순례 안내 포스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