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수성구 2017. 1. 2. 06:12

2017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1요한 2,22-28

사랑하는 여러분, 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 23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아드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라야 아버지도 모십니다.
24 여러분은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면, 여러분도 아드님과 아버지 안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25 이것이 그분께서 우리에게 하신 약속,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26 나는 여러분을 속이는 자들과 관련하여 이 글을 씁니다.
27 그러나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28 그러니 이제 자녀 여러분,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래야 그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가 확신을 가질 수 있고, 그분의 재림 때에 그분 앞에서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 요한 1,19-28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떤 형제님께서 지인의 소개로 분위기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선을 보았습니다. 식사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에 둘은 호텔 정식을 주문했지요. 식사를 하면서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옵니다. 클래식에 대해서 거의 문외한 형제님이었지만, 유일하게 아는 비발디의 ‘사계’가 나오니 얼마나 반갑던 지요. 아는 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용히 묻습니다.

“이 곡이 무슨 곡인지 아세요?”

그러자 자매님께서는 음식을 천천히 씹고 음미하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이 고기요? 맛을 보니까 소고기인데요.”

하긴 ‘곡’이나 ‘고기’나 발음이 비슷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발음은 같지만 뜻은 전혀 다르지요. 이렇게 자기의 주관심사에 따라서 들리는 말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관심사는 무엇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주관심사라면 주님의 말씀이 제대로 들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많은 부와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얻는데 최선을 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떠나서 더 높은 가치를 따르며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철저하게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을 떠올려 봅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서 묻는 유다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어떻게 하느냐에 자기를 이 세상에 들어 높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하게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고백하면서, 예수님보다 더 위대하게 여기는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 주십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는 대사제 즈카르야였고 그의 출생에 관련된 일도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렇다.”라고 한 마디만 해도 사람들은 구름같이 모여들면서 열정적으로 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베푸는 세례에 관해 겸손하게 말하면서 자기는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합당치 않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모습이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말하는 주님 안에서 머무는 모습이 아닐까요?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그 뜻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 안에서 철저하게 머물고 있습니까? 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신 겸손입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내가 아닌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으며, 이로써 주님 안에서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최선의 것을 세상에 주라. 그러면 최선의 것이 돌아올 것이다(M.A. 베레).


성 대 바실리오.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자(최천호)

사람들은 무수한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 그 인연 속에 고운 사랑도 엮어가지만 그 인연 속에 미움도 엮어지는 게 있다.

고운 사람이 있는 반면 미운 사람도 있고, 반기고 싶은 사람이 있는 반면 외면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고운 인연도 있지만 피하고 싶은 악연도 있다.

우린 사람을 만날 때 반가운 사람일 때는 행복함이 충족해온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만날 때는 그다지 반갑지 않아 무료함이 몰려온다.

나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사람도 있다.

과연 나는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있는가. 과연 나는 남들에게 어떤 인상을 심어 주었는가. 한번 만나면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한번 만나고 난 후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진솔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사람을 대한다면, 나는 분명 좋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야 말로 다시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한번 만나고 나서 좋은 감정을 얻지 못하게 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불행에 속할 것이다.

언제든 만나면 반가운 사람으로, 고마운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언제든 만나고 헤어져도 다시 만나고 싶은 그런 사람이 되자.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나는 어떤 사람일까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일까요? 이제 절대 만나기 싫은 사람일까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될 때 이 세상 안에서 그만큼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어 보세요. 그만큼 더 나아지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