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수성구 2017. 1. 4. 06:41

2017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4일 주님 공현 전 수요일

제1독서 1요한 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복음 요한 1,35-42

그때에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요즘에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하긴 매스컴 기사를 통해서 바라 본 우리나라의 현실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작년 말에 발표된 ‘2016년 사회조사 결과’를 보면, 10명 중 4~5명은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대신 그냥 함께 사는 동거에 찬성한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다름 아닌 경제난 때문입니다. 하긴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모습이 과연 올바른 사회의 모습일까요? 그러다보니 체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합니다. 지금의 상황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다’라는 생각으로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체념’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

너무나도 슬픈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체념을 통해 삶의 의지가 꺾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조난자들을 죽음으로 모는 것은 식량 부족이나 체력 저하가 아니라고 하지요. 희망을 버리는 순간에 조난자는 모든 것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즉, 체념을 통해 삶에 대한 의지가 완전히 꺾이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무척 단순한 이유 하나 때문에 실패를 경험한다고 하지요. 바로 너무 일찍 희망을 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일 년만 참으면 성공이 온다는 것을 안다면 희망을 버릴까요? 평생의 삶 중에서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아주 적은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는 것은 희망이 없다고 단정 짓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오는 요한의 제자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답변하지요. 동문서답과 같은 모습입니다. 하지만 어디에 묵고 있는 지를 묻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알고 싶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그들이 정말로 찾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예수님을 따라갔던 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던 안드레아가 말했듯이 ‘메시아’였습니다. 지금의 어려움과 혼란, 고통과 시련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주실 구원자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메시아를 어떻게 찾을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들의 의지를 세워서 ‘와서 보았기’ 때문에 메시아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삼포의 시대, 체념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나서서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라고 하실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직접 주님 앞에 와서 볼 때에 희망을 얻게 되고, 그 희망으로 지금을 힘차게 살 수 있게 됩니다.

희망의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나만이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아무도 날 대신해 해줄 수 없다(캐롤 버넷).


주님 안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망의 끈

저는 고 장영희 교수님의 글을 좋아합니다. 그분이 번역하신 영시도 좋아하고, 또한 그분이 쓰신 수필집 역시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이 분의 삶을 알게 된 후부터 더욱 더 글을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장영희 교수님께서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척수 소아마비를 앓아 두 다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도 못해 누워 있어야만 했지요. 그래서 그녀의 어머니가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딸을 업고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평생 목발을 의지해 살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1년부터 9년간 세 차례나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했지요. 2001년에 유방암에 걸렸으나 강인한 의지로 다시 회복했습니다. 하지만 2004년에 척추로 전이된 암은 다시 간으로 전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힘겨운 투병 생활 끝에 결국 주님의 곁으로 가셨습니다.

이렇게 힘겨운 삶을 사시면서도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

이런 믿음으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셨습니다. 그 희망이 교수님의 글에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가장 힘든 길을 가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힘든 길이라는 것은 스스로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즉, 나 스스로 만든 길이라는 것이지요.

어떠한 순간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희망의 끈의 끝자락에는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꽉 잡고 놓지 않으십니다.


생전의 장영희 교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