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

수성구 2017. 1. 3. 06:42

2017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3일 주님 공현 전 화요일

제1독서 1요한 2,29─3,6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29 의로우신 분이심을 깨달으면,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자녀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그분께 이러한 희망을 두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순결하신 것처럼 자신도 순결하게 합니다. 4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5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께서는 죄를 없애시려고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분 안에는 죄가 없습니다. 6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분을 뵙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자입니다.


복음 요한 1,29-34

그때에 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0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31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32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33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34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인 생각 중에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내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실제로 이렇게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은 가능할까요? 불가능할까요? 단적으로 말하면 불가능합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 역시 생전에 무조건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빵을 구하기 위해 다른 수녀님과 함께 어느 마을의 빵집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빵집 주인은 온갖 욕을 성녀에게 하면서 기부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당시에 이미 살아있는 성녀라고 불려왔던 마더 데레사 성녀가 아니십니까? 이 모습을 본 함께 했던 수녀님께서 억울해 하면서 성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녀님, 정말로 너무하지 않습니까? 수녀님께서는 전 세계에서 인정하는 살아있는 성녀가 아니십니까? 수녀님을 몰라보고 저런 말과 행동을 어떻게 할 수가 있지요?”

그러자 성녀께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빵을 구하러 왔지, 자존심을 구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성녀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모욕을 당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잊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배고파하는 이들을 위한 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얻는데 주력하지 않고, 대신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고 또 그렇게 증언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제사에서 숫양 등의 여러 종류의 동물이 사용되었는데, 이 중에 어린양은 백성을 위하여 매일 바치는 번제물 가운데 최상의 제물이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위해 최상의 제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한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세상에 증언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아 뵐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광야에 살면서 죄를 짓지 않고 철저하게 하느님 아버지 품에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예수님 안에 머무르시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어떤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억울해하고 분해하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서 혹시 주님의 품 안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미소로 대합시다. 미소는 사랑의 시작이니까요(마더 데레사).


2016년 새벽 묵상 글도 이렇게 묶어서 책꽂이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2001년부터 총 16권이네요.


걱정은 이제 그만...

지금 콘서트홀에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오케스트라가 교향곡을 연주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훌륭하고 안락한 의자에 앉아서 이제 막 음악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자동차 문을 잠그지 않은 게 생각납니다. 자동차 안에 고가의 사진기가 있는데 말이지요. 이제 어떨 것 같습니까? 더군다나 연주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음악을 과연 즐길 수가 있을까요? 나가지도 못하고 즐기지도 못한 채 꼼짝 없이 붙잡혀 있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음악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걱정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즐길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 안에서 걱정을 줄여 나가는 방법, 그것이 바로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주는 길입니다. 문제는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일어나지 않을 걱정, 일어나도 바꿀 수 없는 걱정 등으로 우리는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걱정까지도 주님께 맡겨 버리면 어떨까요? 우리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겨내기 힘드니까요.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신 요르단강. 실제 이 자리는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