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수성구 2017. 1. 1. 05:56

2017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새벽을 열며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17년 1월 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민수 6,22-27

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제2독서 갈라 4,4-7

형제 여러분, 4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여인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하셨습니다. 5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6 진정 여러분이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 안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 영께서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고 계십니다. 7 그러므로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복음 루카 2,16-21

그때에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16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21 여드레가 차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게 되자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그것은 아기가 잉태되기 전에 천사가 일러 준 이름이었다.



2017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늘 함께 하시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주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오늘 제1독서에서 해주십니다.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민수 6,27)

주님과 함께 하는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올 2017년이 되셨으면 합니다.

우울증을 앓고 계신 형제님과 나눴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 형제님께서는 자신의 우울증 원인을 어머니에게서 찾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부당하게 대우를 받았고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지요. 즉, 다른 형제와 달리 자기만 외할머니 집에 살았는데, 그때 받은 상처는 나이 50이 넘은 지금에도 잊히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어머니 때문입니까?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라고 질문을 던졌지요. 그러나 이 형제님께서는 “그렇다니까요.”라고 대답하면서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형제님과 거의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극복해서 잘 지내는 분들을 더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조건 어머니 때문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행동했던 어머니를 둔 다른 분들 역시 우울증을 앓으면서 힘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커다란 착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느님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종종 만납니다. 자신이 이렇게 큰 아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가만히 계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자신이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느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정말로 하느님 때문일까요?

자신보다 더 큰 아픔과 고통을 겪으면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분들을 수없이 만납니다. 자신에게 응답 없는 주님께 원망보다는 또 다른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시는 분들이 역시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은 아닐까요?

성모님에 대해 오늘 복음은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라고 전해줍니다. 성모님께서 받으신 고통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불평불만을 던지기보다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길 뿐이었지요. 그러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았고, 어떻게 이 뜻을 따를 수 있는지를 관찰하고 묵상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 역시 이런 태도를 취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관찰하고, 그 활동의 의미를 발견해 내고, 또 그와 같은 모양으로 활동해야 합니다. 이러한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이신 주님 안에서 참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은 희망 없이 있을 수 없고, 희망은 두려움 없이 있을 수 없다(바뤼흐 스피노자).


정유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 가치를 인정하기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음식이 있습니다. 특히 외국에 나가면 ‘이런 것을 어떻게 먹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남미에 갔다가 봤던 ‘꾸이’라는 음식은 ‘기니피그’라는 쥐과의 동물입니다. 중국에 갔다가 본 ‘비둘기’ 구이나 곤충 요리 역시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내가 싫다고 해서 나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제게만 징그럽고 혐오스러울 뿐 그 지역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좋아하면서 즐겨 먹는 음식입니다.

이렇게 싫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인간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그냥 별다른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싫은 사람이 곧 나쁜 사람일까요? 어떤 사람이 나를 싫어한다면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다를 뿐이지, 내가 가치 없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내 가치 자체에 집중한다면 어떨까요? 다른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