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4569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복음은 유다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죄가 크다는 것과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른 민족들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비유이다. 첫째 두 아들의 비유에서 맏아들은 노아의 후손들인 다른 민족 사람들을, 작은아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들을 의미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맏아들이 바리사이들을, 작은아들은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28절) 포도밭에서 일한다는 것은 현세에서 정의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포도밭은 우리의 ..

빛은 동방에서

빛은 동방에서 민수 24,2-17; 마태 21,23-27 / 2021.12.13.; 성녀 루치아;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5세기 경 로마 박해시대에 동정의 몸으로 신앙 진리를 위하여 순교한 그의 이름은 라틴어로 ‘빛’을 뜻합니다. 발라암은 지파별로 자리잡은 이스라엘을 보고, 별 하나가 솟을 것임을 보고 신탁을 선포하였는데(독서), 예루살렘 성전의 사제들은 성전에서 군중을 가르치시는 예수님께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는지를 따져 물었습니다(복음). 별은 빛이요 권한은 법입니다. 본시 로마에 전해진 신앙 진리는 동방에서 전해진 빛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민족에게 신앙 진리의 빛은 서방에서 전해졌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처음 소개된 성경은 명말청초(明末淸初)에 중국에 파견된 서양 ..

성녀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성녀 루치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복음: 마태 21,23-27: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져 묻는다. 그들은 위대한 기적들을 많이 보았다. 그 기적들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이 사건들을 통하여 모든 위험을 보았기 때문이다. 구제하기 어려운 그들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질문의 뜻을 이해하고 답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더는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

대림 제3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3주일 : 다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3주일: 다해 오늘의 전례는 모두가 ‘기쁨’에의 초대의 내용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제로 하므로 ‘기쁨의 주일’, 혹은 ‘장미주일’이라고 한다. 이러한 날 우리는 또한 우리보다 어렵고 고통당하는 이웃을 생각하는 자선주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주님께서 우리 안에 오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내적인 변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기쁨의 동기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게 된”(요한 1,14) 강생의 신비에서 나오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항구히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요한 세례자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에 대하여 준비시키고 있다. 복음: 루카 3,10-18: 저희는 또..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횃불처럼 예언하다

엘리야가 불처럼 일어서서 횃불처럼 예언하다 - 공동선을 위한 사도직의 조건 집회 48,1-11; 마태 17,10-13 / 2021.12.11.;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이기우 신부 횃불처럼 타오르는 예언자의 열정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행하는 사도직 활동이 공동선을 향할 때 필요한 은총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현존 양식에 충실하면, 역사 안에 그리스도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되어 최고선의 가치를 실현하고 수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별 신자들이 기복신앙에 매몰되지 않고 교회 전체가 교세 증가에 매달리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세상에 빛을 비추고 세상 사람들이 부패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소금의 역할입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다섯 가지 양식으로 계시된 주님의 현존은 우..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7,10-13: 엘리야는 이미 왔으나 알아보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에서는 엘리야의 재림에 대한 논쟁을 보여주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엘리야가 종말 전에 온다(말라 3,23 참조)고 하였다. 엘리야는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예전의 상태로 돌려놓는다고 하였다. 바로 앞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이 영광스러운 변모가 그분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왜 선구자인 엘리야가 나타나지 않는지 물었다. “율법 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10절) 여기서 “먼저”라는 말에는 엘리야가 먼저 오지 않으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자의 오심이 아..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11,16-19: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자 요한도 배척하고 있었고,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시는 예수님도 배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장터에서 편을 갈라 노는 아이들과 같다고 하시는 것이다. 장터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이사야 예언자가 “보라,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자녀들”(이사 8,18)이라고 한 이들이다. 이 아이들은 장터, 곧 광장에 앉아 있었다. 그 장터에는 팔려고 내놓은 물건이 많이 있으며 시끄러운 곳이다. 또 아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리를 질러야 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께서는 요한 세례자를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요한 세례자는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하였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복음: 루카 1,26-38: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시켜 주신 내용이다. 우리는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신비를 입으셨듯이 나약한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하여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월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5,17-26: 지붕을 벗기고 중풍 병자를 예수님 앞에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웃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모습을 보고 있다. 중풍 병자는 주위의 사람들의 믿음과 노력으로, 혹은 동료들의 기도와 희생 때문에 예수께 인도되었고, 은총을 받는다. 모든 병자와 죄인들에게는 그를 주님께 데리고 갈 중재자가 필요함을 말해 준다. 예수께서는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 환자를 침상에 달아 당신 앞으로 내려보낸 그들의 믿음을, 즉 그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 “사람아,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20절) 하신다. 예수님은 그 환자의 영을 먼저 고쳐주신다. 그냥 걷게 되면 다시 죄를 짓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