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수성구 2022. 9. 20. 05:30

정의와 공정을 실천함이 주님께는 제물보다 낫다

잠언 21,1-13; 루카 8,19-21 / 연중 제25주간 화요일; 2022.9.20.; 이기우 신부

 

  영혼을 잊어버린 이 시대에 현대인들이 보여주는 모습에 대해서,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 서문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보여주는 바처럼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는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조화로운 균형인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보면 그와는 정반대로 무법천지 세상이다, 그러니 인간 사회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조화로운 균형질서를 본받으려면 책임을 기초로 자유를 행사해야 하고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권리가 주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을 잊어버리는 바람에 하느님 없이 살고 있는 “현대에서는 장차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신론자가 될 것이며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만 신비가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내다보았습니다. 

 

  두 교황의 성찰과 혜안을 풀어서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을 살펴봅니다. 이스라엘의 현인들은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는 인격적 제물이 소나 양 같은 번제물보다 낫다고 권하고 있는데 비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여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전해주는 말씀은 사람의 머리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밝혀주신 계시 진리입니다.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지혜, 즉 예지(叡智)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 예지를 하느님께로부터 받으려면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행동이 필요한데 그것이 주님을 향하는 세 가지 덕 곧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주시기를 청하는 덕인 신덕(信德), 하느님께서 정의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희망하는 망덕(望德),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자 하는 애덕(愛德)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 향주삼덕에 기초하여 인간의 본성을 수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윤리적인 덕목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네 가지 덕을 사추덕(四樞德)이라 합니다. 계시의 문이 아직 활짝 열리지 못했던 구약시대의 지혜로는 정의와 공정만을 대표적으로 들고 있으나, 그리스도 이후 신약의 지혜를 근거로 하는 가톨릭 윤리신학에서는 활짝 열린 계시의 문에 들어갈 수 있었던 덕분에 정의와 공정을 뛰어넘어서 지식과 정의와 용기와 절제의 덕행이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피조물에 대해서 아는 정보를 지식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세상의 경험과 정보와 지식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쓸 줄 아는 실력이 있어야 지덕입니다. 우리 사회에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 많아도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덕의 다음은 이 지덕을 바탕으로 선을 행할 줄 아는 의로움과 용기가 필요한데, 이를 의덕(義德)과 용덕(勇德)이라 합니다. 그래서 소나 양 같은 번제물이 아니라 공정과 정의 같이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실천을 제물로 바쳐야 올바른 제사가 될 수 있다는 오늘 독서인 잠언의 가르침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향주덕을 향한 지덕을 바탕으로 하고 의덕과 용덕을 합쳐야 한다는 본격적인 진리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추덕의 마지막은 절제의 덕인 절덕(節德)입니다. 무슨 노력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되 이루어진 결과에 만족하라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의 덕목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려면, 구약의 지혜가 막연히 전제하고 있는 향주삼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야 하고, 정의와 공정도 지덕과 용덕과 절덕을 합해서 사추덕으로 보완되어야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하자면, 신망애의 향주삼덕은 잘 닦여진 도로이고, 사추덕 중에서 지덕은 하느님께로 목적지가 정확히 표시된 지도를 담은 네비게이션이요, 의덕은 엔진이고, 용덕은 악셀레이터이며, 절덕은 브레이크와 같습니다. 

 

  향주삼덕과 사추덕을 갖춘 신앙인이야말로 현대에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의인이요, 요한 23세가 바라는 조화롭고 균형잡힌 질서를 이룩할 수 있는 창조적 소수이며, 요한 바오로 2세가 희망하는 신비가입니다. 그러자면 이 덕행으로 자신을 수련하여 하느님을 알고, 시대를 알며, 자기 자신도 아는 각성된 개인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미, 다른 어느 시대 어느 나라보다도 어지러웠던 조선 박해시대에 진리의 길을 밝혀준 우리 신앙선조들은 이 길을 걸어간 선구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선조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더 있습니다. 그것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꾸린 ‘가성직자단’에서 발견되는 연대의 조직성입니다. 이벽이 문중박해로 세상을 떠난 1785년부터 조상제사금지령과 함께 해체령을 받은 1790년까지 근 5년 동안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의 힘만으로 전국적으로 4천여 명의 입교자를 배출한 이 ‘가성직자단’은 박해를 예상하고 대비하는 뜻으로 각성된 개인들이 치밀한 점 조직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전국적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로써 전국에 129군데가 넘은 교우촌이 세위질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놓았기에 백년의 모진 박해를 견디어낼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향주삼덕과 사추덕으로 각성된 개인들의 연대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메시지가 우리 신앙선조들이 증명해 준, 오늘 독서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