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합/오늘의 강론

[한가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수성구 2022. 9. 10. 05:17

[한가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요엘 2,22-26; 루카 12,15-21 / 한가위; 2022.9.10.; 이기우 신부

 

  오늘은 한가위 명절입니다. 제각기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조상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기억하며 예를 차리고, 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손주손녀들까지 화목함을 듬뿍 느낄 만한 가족 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예로부터 추석 명절에는 오곡백과가 풍성한 이 계절에 정성껏 준비한 제사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들께 절을 올리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덕담을 건네주면서 제사 음식을 정겹게 나누어 먹으며 가족의 정을 듬뿍 느끼던 풍습이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이 명절에 드리는 조상 제사에 얽힌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에 성리학을 내세워 신분을 차별하고 개인의 양심을 무시하며 공동선이 짓밟히던 상황에서 조선 사회의 개혁을 위해 들여온 천주교에 대해서, 그 취지를 곡해한 자들이 공격하고 박해까지 하게 된 명분은 천주교 신자들이 조상을 공경하는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을 공경하지 않는 패륜의 무리로 오해를 받았더랬습니다. 

 

  사실은 조상 제사에 우상숭배적인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 때에 조상들의 혼을 불러 온다는 이유로 뒷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규정하고는 조상들이 잡수신다고 밥과 국과 반찬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는 초혼의식(招魂儀式)이라든지, 돌아가신 조상들의 이름과 벼슬을 적어 놓은 신주(神主)와 위패(位牌)에 그분들의 혼이 깃들여 있다고 믿어서 신성시하는 풍습 같은 문제점들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 제사의 우상숭배적 요소를 버리고 천주교식으로 조상을 공경하려고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박해자들은 신자들을 임금도 몰라보고 조상들과 죽은 아버지께 공경하지도 않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무리, 즉 패륜 무리로 몰아붙였던 아픈 역사가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터무니없는 누명은 벗겨졌고, 조상 제사도 대폭 간소화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양반 가문에서만 번듯하게 조상 제사를 드리는 특권을 누렸었지만, 이제는 누구나 원하면 조상 제사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특히 사람이 죽었을 때에 바치는 연도(煉禱)를 창작하여 유림이나 일반 한국인보다도 더 정성스럽게 예절을 지내기 때문에 박해 시절에 비하면 조상 공경에 대한 평가가 역전되어 돌아가신 조상들을 가장 잘  모시는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더욱이 죽은 이를 위한 상장례(喪葬禮) 덕분에 천주교의 참모습을 알게 된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입교하게 되는 경우도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것입니다. 유교, 천주교라는 종교적 구분을 떠나서, 민속과 미풍양속을 무시하고서는 살아남을 종교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교하고 복잡한 계산이라도 가감승제(加減乘除)라는 기초 산수를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습니다.  비록 윤리적 차원의 풍습이지만 우리 민족의 오랜 민간 풍속을 잘 받아들이고 오히려 신앙 진리를 반영하여 복음적으로 더 성화시켜서 명절의 공동체적인 의미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외래 종교의 형식으로 더 강화되거나 축소되기도 했지만 추수를 마치고 함께 모여 즐기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민속 행사는 한민족이 모여 살기 시작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매우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온 문화입니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이래로 부여와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등 왕조가 달라졌어도 이 제천의식과 민속 풍습만큼은 이웃 민족들의 문화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성격으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가장 큰 구분은 제천의식에 따른 천손의식과 홍익인간 정신을 지향하는 민속 풍습에 기인한 공동체적인 성격으로서, 귀족과 평민 등 사회적 신분의 차별 없이 모두가 하느님의 자손임을 공표하면서 평등하게 음식을 나누고 놀이를 벌여 상을 주며, 범법자들을 풀어주는 등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 화합을 위한 특별한 때로 지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사회적 약자들은 혜택을 받고 평소에 먹기 힘든 귀한 음식도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년 중 가장 좋은 날씨인 이 명절을 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하는 덕담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상에 대한 공경의 예절을 드리기 이전에 먼저 하느님께 감사의 제사를 바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에 비추어서도 옳고, 천주교 교리에 비추어서도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먼저 성당에 와서 조상들을 기억하는 미사를 봉헌한 다음에,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조상들께 바치는 차례상을 차려 놓고서 공경의 예를 바치고 차례상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가족 간에 신봉하는 종교가 서로 다른 경우에는 각기 다른  종교별 예법을 존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음식 준비와 설거지를 비롯해서 평소보다 많은 노동이 필요한 일에 남녀가 고르게 그 역할을 분담하도록 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가족이 함께 모여 놀이나 문화 활동 등으로 친목을 도모하는 데에도 서로가 즐겁고 평안한 마음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즐거운 명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